이탈리아 피사(Pisa) 근교인 몬테마뇨(Montemagno)에서 평민의 아들로 태어난 에우게니우스(Eugenius, 또는 에우제니오)의 본명은 피에트로 파가넬리(Pietro Paganelli)이다. 그는 1128년 피사의 산 제노(San Zeno) 카말돌리회 수도원의 원장이었고, 1130년대 말 클레르보(Clairvaux)의 성 베르나르두스(Bernardus, 8월 20일)를 만나 그에게 매료되어 1138년 클레르보에서 시토회원이 되었다. 그 후 로마(Rome)의 성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다가 전혀 예상하지 않던 교황으로 선출되자 이름을 에우게니우스라 하였다. 그러나 그의 선출을 반대하던 브레시아(Brescia)의 아르날도(Arnaldo)의 농간과 로마 원로원의 통치를 인정하기를 거부했을 때 그는 로마(Roma)를 탈출해야만 하였다. 그는 1145년 파르마(Parma)의 수도원에서 비밀리에 축성식을 가졌다. 그 후 몇 가지 조약을 체결한 뒤에 로마로 돌아가 정상적인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의 초청으로 그는 1147년에 그곳을 방문하였고 제2차 십자군 운동을 선포하였다. 비록 이 십자군은 성 베르나르두스의 노력이 지대하였지만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트 3세 군대의 패퇴로 말미암아 실패로 끝났다. 에우게니우스 교황은 1147년에 파리(Paris)와 트리어(Trier)에서 교회회의를 개최하고, 다음 해에는 랭스(Reims)에서 교회회의를 열어 아르날도를 단죄하였다. 세상이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았을 때 그는 로마로 귀향하였으나, 1150년에 재차 강제로 로마를 떠나야 했다. 이번에는 티볼리(Tivoli)에 거주하였고, 1153년 붉은 수염왕 프레드리히 1세(Friedrich I) 황제와 콘스탄츠(Konstanz)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교회의 권리를 보증하는데 유익한 협약이었으나, 그는 그해 7월 8일에 그곳에서 선종하였다. 그의 시신은 성 베드로 대성전에 안치되었다. 그는 소란스런 재임 기간을 통하여 몇 가지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동방 교회와 로마와의 일치를 시도하였고, 성직자의 규율을 재정비하였으며, 명예스럽지 못한 성직자들을 제거하였고, 마니교의 재건을 봉쇄하였다. 그는 실로 용기가 많았고 단순하였으며 항상 성 베르나르두스의 영적 권고를 따라 생활하여 덕이 출중하였다. 그는 살아 있을 때부터 공경을 받았고, 사망 후에 그를 통해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그는 1872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시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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