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엘리사벳(Elisabeth)은 1207년 헝가리의 프레스부르크(Pressburg, 오늘날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Bratislava])에서 국왕 앤드레 2세(Endre II)와 왕비 제르트루다(Gertruda)의 딸로 태어났다. 튀링겐(Thuringen) 영주 헤르만 1세(Hermann I)는 정략적 이유로 네 살밖에 되지 않은 성녀 엘리사벳과 자신의 맏아들 헤르만과의 정혼을 제의했다. 그 후 그녀는 어린 나이에 튀링겐의 궁정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생활했다. 궁정의 화려하고 호사스러운 생활 속에서도 성녀 엘리사벳은 자주 기도하며 경건하고 희생적인 삶을 살고자 했다. 1213년 어머니가 헝가리 귀족들에게 살해당하고, 1216년 12월 31일 결혼하기로 약속되어 있던 헤르만이 사망하는 등 어린 나이에 시련도 계속되었다. 헤르만 1세는 자신의 둘째 아들 루트비히와 그녀를 다시 약혼시켰다. 튀링겐 궁정 안에서 많은 사람의 시기를 받으며 적지 않은 고통을 겪었지만, 약혼자 루트비히는 그녀를 보호해주었고 시어머니가 될 소피아도 친어머니처럼 성녀 엘리사벳을 돌보아주었다. 교회를 등지고 정치적 야망을 좇던 헤르만 1세가 1217년 사망하고, 1221년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루트비히 4세는 그 해에 성녀 엘리사벳과 결혼했다. 신랑의 나이는 21살, 신부는 14살이었다. 그들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며 서로를 깊이 신뢰하는 모범적인 부부였다. 성녀 엘리사벳은 자선활동과 기도 생활을 열심히 했고, 남편은 그런 아내를 존중하고 옹호해주었다. 그들의 집은 아이제나흐(Eisenach) 근교의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에 있었고, 자녀는 세 명을 두었다. 맏아들은 어려서 죽었고, 둘째 딸에 이어 셋째 아들은 남편이 사망한 몇 주 후에 유복자로 태어났다. 1221년 작은 형제회가 독일에 정착하면서 성녀 엘리사벳의 삶은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작은 형제회의 첫 독일인 회원인 로데거(Rodeger)가 한동안 그녀의 영성 지도를 담당하면서 성녀 엘리사벳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에 대해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작은 형제회가 1225년 아이제나흐에 수도원을 세우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1227년에 루트비히 4세가 풀리아(Puglia)로 출정하는 십자군에 가담했다가 9월 11일 이탈리아 남동부 오트란토(Otranto)에서 전염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남편이 죽은 후 두 자녀는 다른 곳으로 보내지고 성녀 엘리사벳은 자신의 유산인 헤센의 마르부르크(Marburg) 성에서 쫓겨났다. 친척의 도움으로 밤베르크(Bamberg)의 주교인 숙부 에크베르트(Eckbert)에게 가서 어느 정도 지냈다. 로데거에 이어서 마르부르크의 콘라트(Conrad)가 그녀의 영성 지도를 맡았다. 그는 매우 금욕적이며 엄격한 사람으로 성녀 엘리사벳에게 수도자와 같은 삶을 요구했다. 남편의 유해와 유품을 튀링겐의 가족무덤에 안장한 후 성녀 엘리사벳은 콘라트의 도움으로 남편의 유산을 정리해 자녀들을 위한 대비책을 마련하고 나머지 상당 부분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내놓았다. 그리고 1228년 성금요일에 콘라트가 있는 아이제나흐로 가서 작은 형제회 제3회 회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 해에 마르부르크에 ‘성 프란치스코의 자선 병원’을 세우고 스스로 병든 자, 특히 가장 혐오스러운 병에 걸린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성녀 엘리사벳은 콘라트에게 영적 지도를 받으면서 성덕을 위한 자아 포기의 길에 헌신했다. 누구나 놀랄 정도로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살았으며 깊은 사랑으로 모든 이들을 감싸주었다. 그녀는 선종하기 4년 전에 자신을 쫓아냈던 시동생으로부터 마르부르크 성으로 돌아올 허가를 받았고 또 그녀의 아들에게 백작을 승계시킬 수 있었다. 여왕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직접 음식을 날라주고 옷을 지어 주는 일 등은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이런 이유로 성녀 엘리사벳은 독일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성녀가 되었다. 그녀는 불과 24년밖에 살지 못하고 1231년 11월 17일 마르부르크에서 선종했지만, 오늘날 작은 형제회 재속 제3회의 수호성인으로 높은 공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선종 다음 해에 그녀의 영성 지도신부였던 콘라트는 자신이 쓴 편지에서 성녀 엘리사벳의 영적 풍요로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여인만큼 관상에 깊이 젖어 들어간 이를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수사들과 수녀들이 여러 번 목격했듯이 그녀가 기도의 은밀함에서 나올 때 그 얼굴은 광채로 빛나 그 눈에서 태양 광선과 같은 빛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성녀 엘리사벳은 선종한 후 자신이 마르부르크에 세운 성 프란치스코 병원 성당에 묻혔다. 그녀의 무덤을 찾는 순례자가 늘어나고 무덤에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면서 그녀에 대한 시성 절차가 빠르게 시작되었다. 그래서 선종 4년 후인 1235년 5월 28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이탈리아 페루자(Perugia)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9세(Gregorius IX)가 그녀를 성대히 성인품에 올렸다. 그녀에게 봉헌된 마르부르크의 성녀 엘리사벳 성당의 기초가 그해에 놓였고, 1249년 성녀 엘리사벳의 유해가 새로 건립된 성당에 안치되면서 순례자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1474년에 성녀의 축일이 로마 보편 전례력에 수록되면서 그녀의 성덕은 더욱 널리 퍼져나갔다. 성녀 엘리사벳의 축일은 전통적으로 1969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른 전례력 개정 이전까지는 장례가 거행된 11월 19일에 기념해왔다. 옛 “로마 순교록” 역시 11월 19일 목록에서 성녀 엘리사벳을 기념했었다. 로마 보편 전례력 개정 이후에는 선종한 날인 11월 17일로 옮겨 그녀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역시 11월 17일 목록에서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세 자녀를 낳고 많은 고통을 겪은 후 미망인으로서 자신이 설립한 병원에서 병자와 가난한 사람을 돌보며 일생을 마친 성녀 엘리사벳의 성덕을 기록하였다. 14세기 이후 교회 미술에서 성녀 엘리사벳은 망토에 장미꽃을 담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그려졌는데, 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려고 몰래 빵을 감추고 나가다가 남편에게 들키자 그 빵이 장미꽃으로 변했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빵 제조업자와 빵집 그리고 자선사업 기관의 수호성인으로 큰 공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그녀는 헝가리와 독일의 여러 도시의 수호성인으로서만 아니라 독일의 ‘국가적 성인’으로도 여겨졌었고, 헌신적인 자선활동으로 인해 개신교 신자들에게도 큰 존경을 받고 있다. 그녀는 ‘헝가리의 엘리사벳’ 또는 ‘튀링겐의 엘리사벳’이나 ‘이사벨라’(Isabella, Isabel)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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