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데 브리토(Joannes de Britto)는 1647년 3월 1일 포르투갈 리스본(Lisbon)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9살 때 왕자의 시중을 들기 위해 왕궁으로 들어갔고, 1662년 15세의 나이로 부모와 왕자의 반대를 물리치고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입회 때부터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우스(Franciscus Xaverius, 12월 3일)와 같은 선교사의 길을 소망한 그는 1673년 2월 5일 사제품을 받은 후 바로 인도 선교를 위해 파견되었다. 리스본을 떠나 그해 9월 고아(Goa)에 도착해 수련과 타밀어 공부를 병행한 후 마두라이(Madurai)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쳤다. 그는 당시 선교지역의 문화와 풍습을 존중하며 복음을 선포하던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원칙에 따라 될 수 있는 대로 그곳 주민들의 언어와 생활 습관 등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복장도 당시 힌두교의 수행자들이 입던 진노랑의 승복으로 바꿔 입고, 지역 주민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그 과정에서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만나자 그 지역 통치자와 브라만들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마두라이 지역에서 11년 동안 복음을 전한 그는 1685년 마두라이 지역의 선교 책임자가 되었고, 이듬해 5월 입국이 금지되어 있던 마라바(Marava) 지역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의 개종자가 나오자 교리교육을 도와주던 협력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약 한 달간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은 후 8월에 풀려났다. 다시 마두라이로 돌아온 그는 예수회의 대의원으로 뽑혀 유럽 교회에 가서 인도의 선교 상황을 보고하고,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690년 다시 인도로 돌아왔다. 1692년 그는 신자들을 방문하고자 다시 마라바로 들어갔고, 예비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미사를 봉헌하며 선교 활동을 재개했다. 당시 그가 머물던 곳의 한 왕자가 병으로 고생하던 중 성 요한 데 브리토 신부를 돕던 교리교사들의 극진한 간병으로 치유되자 세례받기를 청했다. 성 요한 데 브리토 신부는 왕자에게 여러 명의 아내 중 첫 번째 부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돌려보내길 요구했고, 왕자는 그의 뜻대로 실행하고 나서 1693년 1월 6일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런데 왕자가 돌려보낸 부인들 중에 왕의 조카딸이 있었다. 이로 인해 앙심을 품은 왕은 군인들을 보내 성 요한 데 브리토 신부를 체포한 후 자신의 지역에서 다시는 선교 활동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긴 죄로 오리유르(Oriyur) 지역으로 추방해 죽이도록 명했다. 1월 31일 오리유르로 이송된 그는 2월 4일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그는 1853년 8월 21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시복되었고, 1947년 6월 22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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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성인명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수 |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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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요한 데 브리토 ...] | 예수회의 성인들: 성 요한 데 브리토 | 주호식 | 2014/04/16 | 210 |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