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네스 드 브레뵈프(Joannes de Brebeuf, 또는 요한 드 브레뵈프)는 1593년 3월 25일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Normandie)의 콩데쉬르비르(Conde-sur-Vire)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캉(Caen) 근처에 있는 대학에서 인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1617년 11월 8일 24살의 나이로 루앙(Rouen)에서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1619년부터 1621년 사이에 루앙에 있는 예수회 대학에서 교사로 일했는데, 1620년에 결핵에 걸려 제대로 공부할 수도 가르칠 수도 없었고 사제직을 감당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다행히 회복되어 1622년 2월 퐁투아즈 대성당(Pontoise Cathedral)에서 사제품을 받고 루앙의 예수회 대학에서 재정 담당 소임을 맡았다. 그 후 그는 선교사를 지원하여 1625년 4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디에프(Dieppe) 항구를 떠나 그해 6월 19일 캐나다의 퀘벡주(Quebec州)에 도착했다. 그는 주로 북미 인디언의 한 부족인 휴런족(Hurons)이 많이 거주하는 동부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처음 2년간은 휴런족의 말과 관습을 익히는 데 주력하며 선교활동을 펼쳤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게다가 1629년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해 퀘벡 지역을 영국이 점령하고 예수회원들을 쫓아낼 때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신부도 어쩔 수 없이 프랑스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루앙에서 지내다가 1630년 종신서원을 하고 이듬해부터 프랑스 북부 외(Eu)의 대학에서 근무하던 중 성 안토니오 다니엘(Antonius Daniel) 신부를 만나 다시 휴런족 선교에 대한 열의를 품게 되었다. 1632년 프랑스가 캐나다 식민지에 대한 권리를 회복한 후 성 요한 드 브레뵈프는 1633년에 캐나다로 다시 돌아와 이전과 같은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이 시기에 프랑스의 예수회원들이 대거 캐나다의 퀘벡 지역으로 들어왔다.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신부도 성 안토니오 다니엘 신부와 함께 학교를 개설하고 선교에 열정을 쏟았다. 하지만 전염병이라는 큰 난관에 봉착했는데, 1637년 천연두가 만연하면서 수천 명의 인디언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휴런족을 비롯한 인디언들은 유럽인에게서 전염된 천연두로 인해 엄청난 희생을 경험했고, 그 와중에 선교사들은 대재앙을 몰고 온 악마로 간주되어 인디언 주술사들로부터 큰 곤욕을 치르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다. 성 요한 드 브레뵈프는 휴런족의 거의 절반이 천연두로 사망하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들 곁을 떠나지 않고 1640년까지 함께 거주하였다. 그러면서 무엇보다 먼저 휴런족의 말을 배우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휴런족의 말을 능통하게 하게 되면서 그는 그들의 언어로 교리서를 저술하고, 다른 선교사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프랑스어-휴런어(French-Huron) 사전’까지 만들었다. 1637년에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인디언 원주민들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선교활동을 펼치도록 권고하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위한 지침서를 발간하였다.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신부의 이러한 노력으로 개종하고 세례받는 인디언들이 조금씩 늘었다. 그는 1640년 빙판에서 넘어져 잠시 퀘벡으로 가서 휴양하고 나서 다시 휴런족 마을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즈음 프랑스에 적대적인 이로쿼이족(Iroquois)이 휴런족 마을을 습격해 큰 피해를 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예수회 회원들의 순교도 속출하였다. 1642년에 예수회의 성 이사악 조그(Isaac Jogues) 신부와 성 르네 구필(Rene Goupil) 수사가 이로쿼이족의 일파인 모호크족(Mohawks)에게 붙잡혀 그해 9월 29일 성 르네 구필 수사가 도끼에 맞아 순교하였다. 그리고 1년 이상 노예로 혹사당하다가 풀려난 성 이사악 조그 신부도 몇 년 후 다시 그들에게 붙잡혀 1646년 10월 18일 도끼에 맞아 순교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그의 보조자이자 동료인 성 요한 드 라랑드(Joannes de Lalande)도 순교하였다. 이러한 예수회원들의 순교는 휴런족의 개종으로 조금씩 그 열매를 맺어갔다. 1648년 7월 4일에는 성 안토니오 다니엘(Antonius Daniel) 신부도 순교하였다. 이렇게 예수회의 여러 동료가 포로가 되어 잔혹한 고문을 받고 순교하는 상황에서도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신부는 끝까지 용기를 잃지 않았다. 1648년 새로 파견 온 성 가브리엘 랄르망(Gabriel Lalemant) 신부와 함께 선교활동을 하던 중 1649년 3월 15일 휴런족의 생루이(Saint-Louis)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다음날 생이니스(Saint-Ignace) 마을을 습격했던 이로쿼이족의 공격을 받아 생루이 마을도 초토화되고 많은 휴런족 인디언이 학살당하는 상황 속에서 선교사들도 체포되었다. 성 요한 드 브레뵈프와 성 가브리엘 랄르망 신부는 생이니스 마을로 끌려가 가장 잔혹한 고문을 받고 16일과 17일에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그해 12월 7일 성 가롤로 가르니에(Carolus Garnier) 신부도 순교했고, 8일에는 성 노엘 샤바넬(Noel Chabanel) 신부도 순교하였다. 성 요한 드 브레뵈프와 성 가브리엘 랄르망 신부의 시신은 동료 예수회원에 의해 발견되어 생트마리(Sainte-Marie)로 옮겨져 묻혔다가 이듬해 퀘벡으로 이장하였다.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이들 예수회원이 보여준 용기와 성덕은 수많은 인디언에게 감동을 주었고, 그들이 순교한 후 약 7천 명의 인디언들이 개종하는 열매를 맺었다. 그러나 1650년 휴런족이 멸망하면서 예수회원들의 선교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듯했지만, 퀘벡주에서 선교하며 순교한 그들의 업적은 17세기 프랑스 예수회의 높은 사도적 영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신부와 7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925년 6월 21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0년 6월 29일 로마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캐나다의 순교자’(수호성인) 또는 ‘북미의 첫 순교자들’로서 성인품에 올랐다. 그들의 기념일은 로마 보편 전례력의 9월 26일에 추가되었으나 1969년 전례력 개정 이후부터 성 이사악 조그가 순교한 다음 날인 10월 19일(10월 18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과 중복을 피하고자)로 변경해 기념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3월 16일 목록에서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신부의 순교에 대해 전해주면서 동료들과 함께 10월 19일에 기념한다고 적었다. 그리고 10월 19일 목록에서 성 요한 드 브레뵈프와 성 이사악 조그 신부와 동료 순교자들의 선교활동과 순교 사실을 전하며 그날 그들 여덟 명 모두를 함께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
번호 | 성인명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수 | 추천수 |
---|---|---|---|---|---|---|
2 | [요한 드 브레뵈 ...] | 예수회의 성인들: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성 이사악 조그와 ... | 주호식 | 2015/04/09 | 415 | 1 |
1 | [요한 드 브레뵈 ...] |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사제와 동료 순교자 독서기도 | 주호식 | 2006/03/03 | 285 |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