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가스파르 델 부팔로는 1786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에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안토니오 델 부팔로(Antonio del Bufalo)와 안눈치아타(Annunziata)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래서 그는 인근 성당에서 세례를 받을 때, 어머니로부터 동방 박사들의 전통적 이름인 ‘가스파르 멜키오르 발타사르’(Gaspar Melchior Balthasar)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부팔로 가문의 후손이었으나 사업에 실패해 로마의 귀족인 알티에리(Altieri) 가문의 요리사로 일했다. 그래서 성 가스파르 델 부팔로는 알티에리 가문의 하인 숙소에서 자랐는데, 길 건너편에는 예수회의 모(母)성당인 “예수 성당”(Chiesa del Gesu)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시력을 잃을 위험에 처했을 때, 그의 어머니가 예수 성당에 모셔진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us Xavier, 12월 3일)의 성해 앞에서 간절히 전구를 청해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 그런 어머니의 영향으로 성 가스파르 델 부팔로 역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갖게 되었고, 나중에 그가 설립한 선교회의 특별한 수호자로 선택하였다. 그는 예수회가 설립한 최초의 대학인 로마의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Pontificia Universitas Gregoriana)에서 교육받고 1808년 7월 31일 로마 교구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시골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의 모임을 조직하고 고아와 가난한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노숙자를 위한 야간 보호소를 마련하는 등 활발한 사목활동을 펼쳤다. 180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는 로마를 점령한 후 교황 비오 7세(Pius VII, 1800~1823년 재위)를 프랑스로 추방하고 성직자들에게 자신에 대한 충성 맹세를 강요했다. 성 가스파르 델 부팔로는 충성 맹세를 거부한 다른 성직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로마 밖으로 추방되어 피아첸차(Piacenza), 볼로냐(Bologna), 이몰라(Imola), 루고(Lugo), 피렌체(Firenze)의 감옥을 전전하다가 1813년 말 4년 만에 로마로 돌아왔다. 로마로 돌아온 그는 막 재건되기 시작한 예수회에 합류할 생각도 했으나 시대적 필요와 교황 비오 7세의 요청에 따라 혼란스러운 시대에 복음을 선포하는 사목에 전념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1815년 움브리아(Umbria)의 지아노(Giano)에 있는 산 펠리체(San Felice) 수도원에서 성혈 흠숭 선교회(Missionariorum Pretiosissimi Sanguinis)를 설립해서 교황의 승인을 받았다. 그는 지역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오랫동안 버려진 수도원을 수리하여 새로운 수도회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는 나폴레옹의 통치 기간이란 어려움 속에서도 황폐해진 이탈리아 중부 전역, 특별히 교황령 지역의 재복음화를 위해 쉬지 않고 노력했다. 많은 도시가 행정 당국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도적들이 해안 지방 마을을 장악한 상황에서 그는 복음을 전하고 성당을 세우고 교육 활동을 강화하면서 자선 사업에도 큰 공을 들였다. 그는 특히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성혈에 대한 신심을 전파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설교는 동시대에 활동한 마체라타(Macerata)의 성 빈첸시오 마리아 스트람비(Vincentius Maria Strambi, 1월 1일) 주교에게 ‘영적 지진과 같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그의 임종을 돕고 팔라티노회(천주교 사도회)를 설립한 성 빈첸시오 팔로티(Vincentius Pallotti, 1월 22일)는 그와 깊은 우정을 나눈 친구였다. 그는 세상의 복음화가 자신이 세운 선교회의 목표임을 늘 강조하였다. 한편 성 가스파르 델 부팔로와의 만남과 활동에 감동한 성녀 마리아 데 마티아스(Maria de Mattias, 8월 20일)는 1834년에 그리스도의 성혈 흠숭 수녀회(Congregation of the Sisters Adorers of the Blood of Christ)를 설립하였다. 1837년 이미 병에 걸려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콜레라가 만연한 로마로 가서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를 돌보았다. 그는 잠시 알바노(Albano)로 돌아왔다가 다시 로마로 갔고, 그해 12월 28일 선종해 로마의 트리비오(Trivio)에 있는 산타 마리아(Santa Maria) 성당에 묻혔다. 그는 1904년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 8월 21일)에 의해 시복되었고, 1954년 6월 12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1962년 10월 21일로 옮겨져 로마와 성혈 흠숭 선교회에서 기념되어왔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성 가스파르 델 부팔로가 선종한 12월 28일로 그의 전례 기념일을 옮겼다. 그리고 그가 로마에서 교회의 자유를 위해 분투했고, 감옥에서도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성혈에 대한 신심을 통해 죄인들의 회개와 개종을 이끌었으며, 성혈의 신심을 기리기 위해 선교회를 설립하고 수녀회의 탄생을 도왔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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