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 출신인 기욤 드 그리모아르(Guillaume de Grimoard)는 1310년경 프랑스의 그리자크(Grisac)에서 태어나 몽펠리에(Montpellier)와 툴루즈(Toulouse)에서 공부한 후 마르세유(Marseille)에서 베네딕토회에 입회하였다. 1342년에 박사 학위를 받고 사제품을 받은 후 몽펠리에와 아비뇽에서 교회법을 가르쳤다. 오세르(Auxerre)와 마르세유 수도원의 아빠스를 역임하고, 교황 클레멘스 6세(Clemens VI)에 의해 수차례 교황 특사로서 여러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1362년 9월 28일 교황 인노켄티우스 6세(Innocentius VI)를 계승하여 교황으로 선출되자 즉시 교회 개혁에 착수하는 한편 교회에 적대적이었던 밀라노(Milano)의 베르나보 비스콘티(Bernabo Visconti)와 굴욕적인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카를 4세(Karl IV) 황제의 요청에 따라 그는 아비뇽에서 로마(Roma)의 교황좌로 돌아왔는데, 이것은 반세기만에 이루어진 큰 사건이었다. 우르바누스(Urbanus, 또는 우르바노) 교황은 성직자 규칙을 강화하고 신심 부흥에 심혈을 기울였다. 1369년 그는 카를 4세의 왕비를 황후로 대관하였다. 1370년 페루자(Perugia)에서 교황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 이탈리아가 전쟁에 휩쓸리게 되었을 때 스웨덴의 성녀 비르지타(Birgitta, 7월 23일)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아비뇽으로 귀향하여 그곳에서 중병에 걸려 그 해 12월 19일에 선종하였다. 아비뇽 주교좌성당에 안장된 그의 시신은 1372년 마르세유의 성 빅토르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1879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시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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