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키프리아누스(Cyprianus, 또는 치프리아노)는 200~210년경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유복한 이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다. 원래 그의 이름은 타스키우스(Thascius)였는데, 나중에 자신을 개종하도록 이끌어준 사제를 기념해 카이킬리우스(Caecilius)라는 이름을 추가로 사용하였다. 그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당대에 뛰어난 수학자이자 법률가였으며 교사였다. 그는 246년경, 비교적 늦은 나이에 속세의 불의와 부패에 회의와 실망을 느끼던 중 하느님의 은총으로 연로한 카이킬리우스라는 사제를 만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그는 즉시 당대의 저명한 성서학자이자 유명한 저술가가 되었다. 그는 세례를 받고 얼마 후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249년 초 신자들의 원의에 따라 카르타고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성 치프리아노는 주교품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아 249년에 일어난 데키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신자들의 권유로 잠시 피신하였으나, 은밀히 피신처에서 편지 등을 보내는 방법으로 교구에 대한 사목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 박해 중에 교황 성 파비아노(Fabianus, 236~250년 재위, 1월 20일)가 순교하고 교황좌가 공석이 되면서 로마 교회를 지도하던 사제단은 그의 피신에 대해 유감을 뜻을 서간으로 전했다. 그는 자신의 피신 동기와 그동안의 활동에 대해 서간으로 보고하고 251년에 교구로 돌아왔다. 교구로 돌아왔을 때 이미 박해로 인해 많은 신자가 순교했고, 그 여파로 인해 교구 내의 많은 배교자도 발생한 상황이었다. 박해의 빌미가 되었던 것은 이교의 신상 앞에 분향하라는 것이었는데, 이를 거부하고 순교한 이들도 많았지만 굴복하여 분향한 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분향하지는 않았지만 분향했다는 증서를 로마 관리들로부터 받기 위해 돈으로 매수한 이들도 있었다. 성 치프리아노는 교구에 돌아오자마자 배교자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교회로 돌아오고자 할 때 그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이런 상황에서 펠리키시무스(Felicissimus) 부제는 주교의 반대자와 일부 증거자와 배교자를 규합해 성 치프리아노 주교에게 정면으로 대립하였고, 게다가 그가 주교품에 오를 때 반대했던 사제 노바투스(Novatus)가 가담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펠리키시무스 부제와 노바투스 신부 등은 배교한 신자들에게 합당한 참회 절차도 요구하지 않고 교회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성 치프리아노는 그들의 지나친 관대함을 나무라며 박해 당시 배교한 이들에 대한 교회의 규율이 준수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래서 죽을 위험에 처한 배교자를 제외하고는 그에 상응하는 공식적인 참회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고, 논란이 심화하면서 새 교황이 선출되기 전까지 배교자를 받아들이는 문제에 관한 결정을 유보하기로 했다. 그런데 251년 3월 교황으로 선출된 성 고르넬리오(Cornelius, 9월 16일)는 배교자들에게 관용과 용서를 베풀자고 했고, 성 치프리아노는 그런 교황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하지만 새 교황 선출에 불만을 품고 스스로 로마 교회의 주교라 칭하며 분열을 일으킨 노바티아누스(Novatianus)는 교회가 배교자들을 결코 용서해줄 수 없다는 강경한 주장을 펼쳤다. 노바티아누스는 자기를 지지하는 주교에게 주교품을 받고 대립 교황이 되어 교회의 분열을 심화시켰고, 카르타고에서 성 치프리아노 주교와 대립하던 노바투스 신부도 로마로 건너와 노바티아누스를 지지하고 나섰다. 결국 노바투스 신부는 지금까지의 견해와 달리 배교자들은 영원히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식의 강경한 주장을 내세우는 배타적 엄격주의자로 돌변하였다. 그러면서 로마 교회와 카르타고 교회 모두 분열의 위기에 처하였다. 성 치프리아노는 251년 봄에 두 편의 저서, “가톨릭교회 일치”(De ecclesiae catholicae unitate)와 “배교자들에 관하여”(De lapsis)를 저술 · 배포하여 신자들이 오류에 빠지지 않고 교회 안에 일치를 이루도록 촉구하였다. 이 문제는 251년 5월 열린 카르타고 주교회의에서 그의 가르침을 공인하면서 해결되었고, 로마 교회에서도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노바티아누스파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다. 배교자 문제가 해결된 지 얼마 되지 않은 252년 아프리카 지역에 흑사병이 발생하면서 교회는 새로운 박해에 직면하게 되었다. 흑사병의 참혹함 속에서 성 치프리아노를 반대하는 이들과 관리들은 그리스도교 신자들 때문에 하늘이 분노해 전염병을 내렸다고 비난하며 박해의 빌미로 삼았다. 성 치프리아노는 “데메트리아누스에게”(Ad Demetrianum)와 “죽음에 대하여”(De mortalitate)라는 저서를 통해 그들의 그릇된 주장을 반박하고,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 치프리아노는 생의 말년에 이단자들의 세례 문제에 대한 논쟁에 휘말렸다. 아프리카 교회에서 제기된 이 문제는 나중에 로마 교회와의 심각한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즉 “이단 교회에서 세례받은 자가 가톨릭교회로 개종하려면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성 치프리아노는 이단자들의 세례는 무효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성 치프리아노는 255년 카르타고에서 주교회의를 열어 자신의 주장을 재확인했고, 256년 71명의 주교가 모인 카르타고 주교회의에서 확실히 결정하여 당시 교황인 성 스테파노 1세(Stephanus, 254~257년 재위, 8월 2일)에게 알렸다. 하지만 교황은 단호히 이를 거부하며 이단자가 교회에 찾아오면 다시 세례를 베풀 필요 없이 합당한 참회 예식을 치른 다음 받아주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답을 보냈다. 그리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파문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는 로마 교회와 아프리카 교회의 대립으로 발전했으나 257년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로 인해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 박해를 강화하면서 그리스도교의 모든 집회를 금지하고 또 모든 주교와 사제와 부제들이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 예식에 참여하도록 요구하는 칙서를 반포하였다. 교황 성 스테파노 1세가 그해 8월 2일 순교하였고, 성 치프리아노 주교 또한 이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지방 총독인 파테르누스에게 재판을 받고 카르타고에서 50마일 거리에 있는 쿠루비스(Curubis, 오늘날 튀니지의 코르바[Korba])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모든 주교와 사제 그리고 부제들을 사형에 처하라는 황제의 칙령이 내려왔다. 성 치프리아노는 새 총독인 갈레리우스 막시무스에게 소환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끝까지 이교의 신에게 제사 바치기를 거부하여 258년 9월 14일 카르타고 근교에서 참수됨으로써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그는 교회, 사목, 성경, 성사 그리고 배교자 문제에 관해 박해와 여러 어려운 상황에서도 13편의 저서와 65편의 서간들을 남겼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교 라틴 문학의 선구자로 추앙을 받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이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모두 9월 14일 목록에서 성 치프리아노의 업적과 순교에 대해 기록하면서 전례적으로는 9월 16일에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함께 기념한다고 언급하였다. 이는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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