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5년 영국 잉글랜드 지방 런던(London)의 서더크(Southwark)에서 태어난 성 토마스 가넷은 잉글랜드 예수회의 관구장이었던 헨리 가넷(Henry Garnet) 신부의 조카이다. 그는 1593년 플랑드르(Flandre) 지방 생토메르(Saint-Omer)에 있는 예수회 대학에 들어갔다. 1595년 그는 몇몇 학생들과 함께 에스파냐 바야돌리드(Valladolid)에 있는 성 알바노(Albanus) 왕립대학의 영국 신학교로 가서 학업을 이어갔다. 그곳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1599년 사제품을 받은 성 토마스 가넷은 잉글랜드로 돌아와 삼촌인 헨리 가넷 신부를 도와 영국 내에서 비밀리에 사목하는 가톨릭 사제들을 도왔다. 영국 선교를 위해 돌아온 그의 마음은 다음의 몇 마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나는 오류를 벗어나 가톨릭교회의 진리를 배우려는 영혼들을 찾아 이리저리 방황하기만 하였다.” 그는 주로 워릭셔(Warwickshire) 일대를 중심으로 사목하다가 1604년 9월 29일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1605년 ‘화약 음모 사건’(Gunpowder Plot)이 발생했을 때 체포되었는데, 마침 함께 살고 있던 사람 중에 관련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런던의 게이트하우스(Gatehouse) 감옥에 있다가 런던탑으로 이송된 그는 헨리 가넷의 조카라는 이유로 갖은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화약 음모 사건과 무관하다는 것이 밝혀져 수개월 후 석방되었고, 1606년 7월 10일 다른 40여 명의 사제와 함께 플랑드르 지역으로 추방되었다. 그는 벨기에 루뱅(Louvain)의 수련소에서 수련을 마치고 1607년 7월 2일 첫서원을 했다. 그리고 그해 9월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와 활동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배교자의 신고로 체포되어 다시 런던 게이트하우스 감옥에 갇혔다. 그는 국왕에 대한 충성 맹세만 하면 살려주겠다는 제안도 단호히 거절하고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1608년 6월 23일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으로 순교하면서도 자기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항변했다고 한다. 성 토마스 가넷 신부는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순교한 날인 6월 23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6월 23일 목록에서 예수회 신부인 성 토마스 가넷이 에스파냐 바야돌리드의 영국 대학에서 사제품을 받고 두 차례나 체포되면서도 영국으로 돌아와 제임스 1세 국왕 치하에서 런던의 타이번에서 교수대에 올라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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