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토마스 우드하우스는 1535년 영국 잉글랜드 중동부 링컨셔(Lincolnshire)에서 태어났다. 그는 국왕 헨리 8세(Henry VIII)와 캐서린(Catherine of Aragon)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메리 튜더(Mary Tudor, 1553~1558년 재위) 여왕이 가톨릭을 영국의 국교를 다시 되돌리는 시기에 신학을 공부하고 1558년경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링컨셔의 한 작은 본당의 주임 신부로 1년 정도 사목하다가 1558년 11월 17일 메리 여왕이 사망하면서 종교적 급변의 시기를 맞이했다. 헨리 8세와 앤 불린(Anne Boleyn) 사이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여왕이 즉위하자 복자 토마스 우드하우스는 1560년 웨일스로 피신해 가정교사로 지내며 비밀리에 사목 활동을 수행했다. 그는 1561년 5월 14일 미사를 봉헌하던 중 체포되어 런던(London)의 플리트(Fleet) 감옥에 갇혔다. 그는 12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면서 매일 성무일도를 바치고 비밀리에 미사를 봉헌하며 옥중에 있는 다른 죄수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그는 1571년 5월 초에 2년 전에 있었던 잉글랜드 북부 지방의 봉기(The Rising of the North)와 관련해서 복자 요한 스토리(Joannes Storey, 6월 1일)가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대신해 교수형을 받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1572년에 파리(Paris)의 예수회 관구장에게 편지를 보내 예수회에 가입하는 열성도 보였다. 그리고 그해 11월 19일 당시 여왕의 재무장관이던 윌리엄 세실(William Cecil)에게 편지를 보내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종교 정책에 대해 비판했다. 그로 인해 그는 1573년 6월 16일 런던의 길드홀(Guildhall)에서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1573년 6월 19일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는 종교적 이유로 엘리자베스 1세 여왕 통치 중에 두 번째로 순교한 인물이자 예수회 회원으로서는 첫 번째 순교자이다. 복자 토마스 우드하우스 신부는 1886년 12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순교한 날인 6월 19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복자 토마스 우드하우스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6월 19일 목록에서 영국 런던에서 예수회 신부인 복자 토마스 우드하우스가 가톨릭 신앙 때문에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때 감옥에 갇혀 12년 이상을 지내면서도 동료 수감자들을 가톨릭교회로 이끌며 노력하다가 타이번으로 끌려가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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