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무키아누스 마리아 위오(Mucianus Maria Wiaux, 또는 무치아노 마리 위오)는 1841년 벨기에의 멜레(Mellet)에서 신심이 매우 깊은 대장장이와 여인숙 주인이었던 신심 깊은 부인의 여섯 자녀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 15세인 1856년 나무르(Namur)에서 그리스도 교육 수도회에 입회하여 세례명인 루도비쿠스(Ludovicus) 대신 로마 순교자인 무키아누스라는 이름을 수도명으로 받았다. 그는 1858년 히메이(Chimay)와 브뤼셀(Brussel)에 잠시 머물다가 말론(Malonne)의 대학으로 부임하여 58년 동안 헌신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삶의 전부를 보냈다. 그러나 성 무키아누스 마리아 위오 수사에게 이 시간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교육 수도회에 몸담고 있었지만 자신은 재능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번외 과목을 가르치고 특별한 교수 방법이 필요 없는 일들을 소임으로 맡았다. 비록 그는 책에 쓰인 지식을 전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가장 적은 재능을 그 능력의 한계까지 끌어올리는” 은총을 받았다. 각 개인에게 있어 최고의 것을 끌어내는 능력은 성 무키아누스 마리아 위오 수사가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이유였다. 그의 삶에 있어서 온화함과 성스러움은 “항상 기도하는 수사”로 인정받는 탁월한 모범이었다. 성 무키아누스 마리아 위오의 묘소를 참배하는 관습은 그의 선종 직후부터 생겼다. 벨기에에서 그는 하느님과의 중재자로 알려져 사후 20년도 지나지 않은 1936년부터 시성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1977년 10월 30일 동료 수사 성 미카엘 페브레스 코르데로(Michael Febres Cordero, 2월 9일)와 함께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89년 12월 10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무키아누스 마리아 위오의 시성식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벨기에의 빛, 그의 수도회의 빛”으로 선포하였다. 벨기에의 주교들은 성 무키아누스 마리아 위오에 대해 그가 어떠한 신학적, 영적 명제도 남기지 않았고, 그의 이름을 떠올릴만한 무엇도 남기지 않았지만, 일상적인 삶 안에서 그는 늘 기도하는 사람으로서 학생들 사이에서 사도였으며, 매일의 업무를 성덕으로 이행하여 누구도 아프지 않게 하며 모든 이를 용서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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