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로베르투스 벨라르미노(Robertus Bellarmino, 또는 로베르토 벨라르미노)는 1542년 10월 4일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의 몬테풀치아노(Montepulciano)에서 태어났다. 벨라르미노 가문은 이탈리아의 명문 귀족으로 개혁적 교황으로 유명한 마르첼리노 2세(Marcellinus II)가 그의 외삼촌이다. 그는 1560년 10월 로마에서 예수회에 입회하여 1563년까지 로마학원(Roman College)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피렌체(Firenze)에서 문학과 수사학을, 몬도비(Mondovi) 대학에서 수사학을 공부하고 1570년 3월 25일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1569년부터 벨기에 루뱅(Louvain)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품을 받은 후에는 예수회 신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당시 루뱅 대학은 종교 개혁자들에 대항해 가톨릭교회를 방어하느라 교회사와 교부학에 관한 연구가 경시되던 분위기였다. 토스카나 출신의 유망한 젊은 신학자로서 그는 종교 개혁자들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교회의 교의를 체계화하기 위한 성경과 교회사 그리고 교부학 연구에 매진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럼으로써 가톨릭 신학을 새롭게 정비하는데 그의 모든 정열을 바쳤다. 1576년 그는 교황 그레고리오 13세(Gregorius XIII)의 부름을 받고 예수회의 로마 학원에서 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자신의 강의록을 바탕으로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이단 반박론”(Disputationes de Controversiis Christianae Fidei adversus huius temporis Haereticos, 1586~1593년)이라는 세 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이는 당시 가톨릭의 신학적 입장을 변호하는 대표적인 신학 서적이면서 프로테스탄트의 약점과 강점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갖고 저술되었으나 그 당시에는 배척당하기도 했다. 또한 교의 논쟁에서 교황은 무류권을 지닌 최고의 심판관이며 교회 전체의 신앙과 관련된 가르침을 준다고 했다. 그리고 교황의 세속권에 대해서는 일차적으로 영적인 분야에 한정되지만 경우에 따라서 간접적으로 세속사에 관해서도 수위권을 갖는다는 중도적 입장을 제시했다. 그리고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은 유지될 수 없는 것’으로 표현함으로써 영국과 프랑스의 분노를 초래하기도 했다. 또한 세속의 문제에 대한 교황의 권한이 간접적이라는 견해 때문에 교황 식스토 5세(Sixtus V)의 오해를 사기도 했다. 그로 인해 그의 “이단 반박론” 제1권이 금서 목록에 포함될 위기도 있었으나 교황이 병으로 갑작스럽게 선종하면서 그 계획은 후임 교황 우르바노 7세(Urbanus VII)에 의해 취소되었다.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는 또한 1597년과 1598년에 두 권의 “교리서”를 발간했다. 그가 로마학원에서 신학을 강의할 때 평수사와 학생들을 위해 실시한 교리교육 강의가 학부 과정의 필수 과목이 되었고, 수많은 청중이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왔다. 그는 여러 성직자의 권유와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의 지지를 받아 강의 내용을 정리해서 두 권의 책으로 발간했는데, “어린이를 위한 교리서”(Dottrina cristiana breve)와 “교사들을 위한 교리서”(Dichiarazione piu copiosa della dottrina cristiana)가 그것이다. 이 책들은 그 내용이 쉽고 간결해 출간 즉시 인기 도서가 되었고 곧이어 60여 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그 외에도 그는 많은 이들의 신앙심을 북돋아 주는 영적 · 사목적 책들을 발간했다. 1588년부터 그는 로마학원 학생들의 영적 지도를 담당했는데, 그의 지도를 받은 신학생 중에는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Aloysius Gonzaga, 6월 21일)도 있었다. 그는 1592년 로마학원의 학장이 되었고, 1594년에는 예수회 나폴리 관구의 관구장으로 임명되어 각 공동체를 충실히 방문하며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였다. 1597년 그는 교황 클레멘스 8세의 신학 고문이 되었고, 교황으로부터 ‘학식에서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신학적 공헌이 인정되어 1599년 추기경 사제로 임명되었다. 그는 바티칸 궁전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평소 자신이 실천해 오던 수도자로서의 절제된 생활을 전혀 완화하지 않았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만 먹고 아주 필수적인 것이 아니면 비용 지출을 엄격히 제한했다. 그는 군대에서 탈영한 한 군인의 몸값을 치렀고, ‘벽은 감기 들지 않을 것’이라며 자기 방의 커튼을 가난한 사람의 옷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 그리고 로마 빈민가의 아이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며 기도와 자선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다. 교황청의 주요 직책을 역임한 그는 1602년 나폴리 근처 카푸아(Capua)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교황에게 직접 주교품을 받고 카푸아로 가서 교구 내 사제들의 영적 성장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에 힘썼다. 특히 성직자 개혁과 평신도 어른들을 위한 교리교육을 특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1605년에 그는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로마로 소환되어 바티칸 도서관 관장 겸 교황청 여러 성(省)의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결국 교구장으로서는 3년 정도 사목활동을 한 것이 전부였다. 그 후 그는 여러 논쟁에 참여했는데, 그의 일생에서 마지막으로 중요한 논쟁은 1616년에 일어난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재판과 관련한 것이었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의 지동설(地動說)이 성경에 반대된다는 교회 내 학자들의 주장과 그 주장을 지지하는 갈릴레이 사이의 문제에 관여하게 되었을 때, 그는 이 문제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갈등으로 번지자 갈릴레이의 의견에 다소 공감하면서도 그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교령 반포에 참여하였다. 그는 성경과 과학의 조화를 다루는 데에 다소 주저하였다. 그는 1621년 은퇴하여 로마의 퀴리날레(Quirinale) 언덕에 있는 예수회의 성 안드레아 수련소에 머물다가 그해 9월 17일 선종하였다.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 축일에 태어났던 그는 평소 자신의 신앙적 모범으로 삼았던 성 프란치스코가 오상(五傷, Stigmata)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에 선종한 것이다. 그의 시복시성 과정은 1627년에 시작했으나 그의 저서에서 연유된 정치적 이유로 인해 지연되다가 1923년 5월 13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0년 6월 29일 성인품에 올랐다. 그리고 1931년에 같은 교황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의 시신은 예수회를 설립한 로욜라(Loyola)의 성 이냐시오(Ignatius, 7월 31일)가 묻힌 로마의 예수회 성당에 묻혔다. 1923년 복자품에 오른 이후 비로소 생전에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의 시복을 추진하며 언젠가 그의 발밑에 묻히기를 원했던 그의 뜻대로 로마의 성 이냐시오 예수회 성당(Sant’Ignazio di Loyola in Campo Marzio)으로 옮겨 젊은 예수회 신학생 옆에 묻힐 수 있었다. 그의 축일은 1932년 그가 복자품에 오른 날인 5월 13일로 전례력에 추가되었다. 그리고 1969년 로마 보편 전례력 개정 이후부터는 선종한 날인 9월 17일로 옮겨 기념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17일 목록에서 예수회의 주교이자 교회박사인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가 깊은 통찰력으로 그 시대의 신학적 논쟁에 훌륭하게 참여해 의견을 제시했고, 추기경으로서 또 카푸아 교구의 대주교로서 사목 직무에 헌신했으며, 마침내 로마에서 사도좌와 신앙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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