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로베르투스 사우스웰(Robertus Southwell, 또는 로베르토 사우스웰)은 1561년경 영국 잉글랜드 동부 노퍽(Norfolk)의 호셤세인트페이스(Horsham Saint Faith)에서 부유한 부모의 여덟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1576년 5월 사제가 되기 위해 프랑스 북부 두에(Douai)에 있는 가톨릭 신학교인 영국 대학으로 갔다. 그곳에서 공부하던 중 프랑스와 에스파냐 세력이 충돌하자 안전을 위해 파리의 클레르몽 대학으로 보내졌다. 그는 그곳에서 예수회의 토마스 다비셔(Thomas Darbyshire)를 만나 그의 지도하에 공부하며 예수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나이가 어리다고 입회가 거부되자 1577년 6월 15일 두에로 돌아왔다. 1년 후 그는 예수회에 입회하기 위해 로마까지 걸어가 1578년 10월 17일부터 로마의 성 안드레아 수련원에서 지원기를 보내고 1580년 예수회원이 되었다. 수련기를 마친 후 그는 로마의 예수회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1584년 학위를 취득한 다음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로마의 영국 대학에서 학생 지도 소임을 맡아 2년을 보냈다. 1586년 영국 선교사로 보내달라는 그의 청원이 허락되어 그는 헨리 가넷(Henry Garnet) 신부와 함께 영국으로 출발했다. 그해 7월 17일 영국 해안에 도착한 그들은 각자 런던을 향해 떠났다. 성 로베르토 사우스웰은 런던과 그 일대에 대한 선교 책임을 맡았고, 헨리 가넷은 잉글랜드 중부 지역의 선교 책임을 맡았다. 그는 비밀리에 가톨릭 신자 집의 은신처에 머물며 다른 선교 사제들의 활동을 돕고 그들에게 은신처를 소개해주었다. 또 감옥에 갇힌 이들을 돌보고, 신자들을 만나 미사를 봉헌하고 성사를 베풀었다. 헨리 가넷 신부가 영국 예수회의 책임자가 되어 런던으로 온 뒤로 성 로베르토 사우스웰은 주로 런던 외의 지역에서 활동했다. 1587년경 헨리 가넷이 신자들을 위한 출판물을 인쇄하기 위해 비밀리에 가톨릭 출판사를 만들자 그는 그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그는 평소 문학에 소질이 많아 많은 시간을 글을 쓰는데 투자했다. 그렇게 6년 정도 검거를 피하며 비밀리에 활동하던 그는 한 여성의 배신으로 1592년 6월 25일 체포되었다. 가톨릭 사제 사냥꾼으로 유명한 리차드 톱클리프(Richard Topcliffe)는 그를 체포한 후 자신의 집에 가두고 다른 사제들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고문을 자행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자 여왕의 명령으로 6월 28일 그를 게이트하우스(Gatehouse) 감옥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그는 추밀원의 심문과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아무 정보도 말하지 않았다. 고문 집행관은 결국 그를 극빈자들을 가두는 감옥에 가뒀다. 벌레가 기어 다니는 더러운 감옥에 시체처럼 누워있는 아들을 본 성 로베르토 사우스웰의 아버지는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여왕에게 탄원서를 보내 아들에게 죄가 있으면 처형하고 아니면 신사답게 대우하라고 요청했다. 얼마 후 그는 런던탑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여러 편의 시를 썼는데, 이것은 가톨릭 신자들을 격려하는 목적 외에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화합을 노래한 것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그 외에도 그는 ‘장례식에서 흘린 마리아 막달레나의 눈물’, ‘위로의 편지’ 그리고 ‘죽음을 이긴 승리’ 등의 글을 남겼다. 그가 남긴 시와 글들은 훗날 그가 순교한 후 출판되어 가톨릭 신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는 1595년 2월 18일 런던의 뉴게이트(Newgate) 감옥으로 이송되었고, 2월 20일 웨스트민스터 홀(Westminster Hall)에서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다음날 오전, 그는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로베르투스 사우스웰은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순교한 날인 2월 21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2월 21일 목록에서 예수회 사제인 성 로베르토 사우스웰이 런던과 인근 지역에서 수년 동안 사제직을 수행하고 영적 찬미가를 썼는데, 여왕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잔인한 고문을 당한 후 타이번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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