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마르첼리누스(또는 마르첼리노)는 296년에 교황 성 카이오(Caius, 4월 22일)를 계승하여 로마(Roma)의 주교인 교황좌에 올랐다. 그의 생애나 재임 기간 등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에 따르면 그는 프로젝투스(Projectus)의 아들로 로마인이며 순교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는 303년 로마에서 시작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년 재위)의 그리스도교 박해를 받지 않고 선종한 후 사제 마르첼루스(Marcellus)에 의해 로마의 살라리아 가도(Via Salaria)에 있는 성녀 프리스킬라(Priscilla) 카타콤바에 묻혔다고 한다. 비문에 따르면 그의 재임 중에 유일하게 기록된 활동은 세베루스(Severus)라는 부제에게 칼리스투스 카타콤바 내의 특정한 구조를 수정하도록 지시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0년 정도 후인 5세기 초에 교황 성 마르첼리노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일시적으로 배교했고, 박해자에게 성경을 넘겨주었다는 악의적 주장이 주로 도나투스파(Donatismus) 이단 신봉자들에 의해 퍼뜨려졌다. 그에 앞서 4세기에 교황 성 다마소 1세(Damasus I, 12월 11일)가 전임 교황들에 대한 헌시를 작성할 때 그를 제외했었고, “예로니모 순교록”(Martyrologium Hieronymianum) 등에도 그의 이름은 빠져 있었다. 하지만 히포(Hippo)의 주교인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8월 28일)는 그런 주장이 잘못된 중상모략임을 강력히 피력했다. 교회사가인 에우세비우스(Eusebius) 역시 그를 ‘박해를 극복한 교황’이라고 했고, 키프로스(Cyprus)의 주교인 테오도레트(Theodoret)도 그가 박해 중에 훌륭한 역할을 했다고 증언하였다. 교황 성 마르첼리노의 생애에 대한 확실한 자료는 없으나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성 마르첼리노 교황의 배교 주장을 근거 없는 거짓으로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배교에 대한 주장이 사후 100년 뒤에 있었고, 411년 카르타고(Carthago) 교회 회의에서 도나투스주의에 대해 논의할 때도 성 마르첼리노의 배교에 대한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옛 “로마 순교록”은 4월 26일 목록에서 다른 전승을 전해주었다. 교황 성 마르첼리노가 막시미아누스 황제(286~305년 재위)의 박해 때 로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참수형을 선고받고 성 클라우디오(Claudius), 성 치리노(Cyrinus), 성 안토니노(Antoninus)와 함께 순교했다는 것이다. 당시 박해가 너무 심해서 한 달 만에 1만 7천 명의 그리스도인이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고 전해주었다. “연대 교황표”는 그가 참수형을 당한 후 다른 그리스도인을 겁주기 위해 25일 동안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공개되어 있다가 304년 4월 26일 살라리아 가도에 있는 성녀 프리스킬라 카타콤바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리베리오 교황표”(Catalogus Liberianus)는 10월 25일을 사망한 날로 기록하고 있고, 순교 여부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동방 정교회는 6월 7일에 교황 성 마르첼리노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념하고 있다. 교황 성 마르첼리노는 13세기에 4월 26일에 축일을 기념하도록 로마 보편 전례력에 추가되었으나 자료의 불확실성 때문에 1969년 전례력 개정 때 삭제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교황 성 마르첼리노와 동료 순교자들의 이름을 더는 기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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