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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포베다 카스트로베르데(7.28)

베드로 포베다 카스트로베르데(7.28)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인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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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베드로 포베다 카스트로베르데 (Peter Poveda Castroverde)
축일 7월 28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순교자, 설립자, 신부
활동지역
활동연도 1874-1936년
같은이름 까스뜨로베르데, 베드루스, 뽀베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성인 기본정보

   성 베드로 포베다 카스트로베르데(Petrus Poveda Castroverde)는 1874년 12월 3일 에스파냐 남부 리나레스(Linares)의 독실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사제직에 대한 성소를 느낀 그는 1889년 하엔(Jaen)에 있는 교구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학비를 감당하지 못해 장학금을 제공하기로 약속한 그라나다(Granada) 주(洲)의 과딕스 교구 신학교로 소속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1897년 4월 17일에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후 성 베드로 포베다 신부는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다른 여러 방면에서 교구의 직무를 맡아 봉사하였다. 그는 1900년 세비야(Sevilla)에서 신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과딕스 외곽 언덕에 있는 대피소에서 살던 일명 ‘동굴 거주자’들 속에서 사도직을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건립하고 어른들을 위한 연수회를 열어 전문적인 훈련과 예비신자 과정을 제공하였다. 하지만 그는 오해를 받아 이 특별한 사도직에서 떠나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북부 에스파냐의 산간벽지에 있는 코바동가(Covadonga)로 향했고, 그곳에서 1906년 아스투리아스(Asturias)에 있는 코바동가 대성당의 참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코바동가에서 그는 더 많은 시간을 기도에 쏟아 부었고, 에스파냐의 교육 문제에 대해 특별히 심사숙고했다. 그는 주님께서 그 시대의 교회와 사회에 새로운 길을 열도록 자신을 초대하셨다고 이해했다. 그는 전문적으로 교사들을 양성하는 일에 대한 논문과 소책자를 출판하기 시작했고,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현존과 활동의 필요성을 느끼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도 접촉했다.

   신앙과 과학의 대립은 그 시대의 문화 안에서 더욱더 분명해졌고, 이는 공교육 제도 안에서 탈(脫)그리스도화를 야기했다. 성 베드로 포베다 신부는 과딕스에서의 사목적 체험과 코바동가에서의 몇 년에 걸친 반성과 기도 후에 공교육 제도 하에 근무하는 교사들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양성해야 할 필요성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굳건한 신앙과 전문적인 자격 둘 모두 복음의 메시지를 살아있게 하는데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했다.

   1911년 그는 학생들을 위한 거주시설인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아카데미를 개설했는데, 이는 교사들을 영성적 · 사목적으로 양성하기 위해 헌신하는 테레지안 연합회(Teresian Association)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에 그는 교구 사제들의 사도직 연합회와 함께 새로운 교수법 센터를 시작하였다. 그 후 그의 작업은 신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던 하엔으로 이어져 ‘창조적 교리교수법 센터’(Los Operarios Catechetical Center)의 영성 지도자와 사범대학의 교수로 활동했다. 1914년 그는 마드리드(Madrid)에서 기숙사 시설을 갖춘 에스파냐 최초의 여자 대학교를 개교하였다.

   그 동안에 테레지안 연합회는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해 다양한 집단과 지역으로 전파되었고, 그를 통해 하엔에서 교회와 시민사회의 인정을 이끌어냈다. 성 베드로 포베다는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평신도들을 위해 그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복음화의 새로운 길로써 테레지안 연합회를 제시했고, 자신의 체험에 근거해서 그들이 복음의 증거자가 되도록 양성해갔다. “굳건히 믿는 것과 침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처럼 그는 모든 이들이 신앙을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투신하기를 원했고, 스스로도 그러한 소망을 실현하며 살았다. 1921년 그는 마드리드로 이동해 왕실 담당사제로 임명되었다. 다음해에 그는 문맹 퇴치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테레지안 연합회를 위해 많은 시간을 헌신해 1924년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다. 그는 비록 직접 지도하지는 않았지만 설립자로서 테레지안 연합회가 후에 칠레와 이탈리아로 전파되었을 때 테레지안 연합회의 사명을 더욱 공고히 하고 촉진하기 위해 힘썼다.

   1936년 발발한 에스파냐의 내전으로 인해 종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고, 마드리드에 있던 성 베드로 포베다 신부 역시 순교의 위험에 놓였을 때 그는 기꺼이 순교할 것을 다짐했다. 1936년 7월 28일 새벽, 박해자들이 그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물었을 때 그는 당당히 대답했다. “나는 그리스도의 사제이다.” 그는 결국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자로서 총에 맞아 순교하였다. 그는 1993년 10월 10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3년 5월 4일 에스파냐 마드리드의 콜론(Colon) 광장에서 100만여 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다른 네 명의 복자들과 함께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식을 갖고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참고자료

  • 한국교회사연구소 엮음, 송영웅 옮김, 오늘 성인(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성한 성인들) - ‘성 페드로 포베다 카스트로베르데’,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14년, 273-277쪽.

사진/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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