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마리아 에우프라시아 펠레티에(Maria Euphrasia Pelletier)는 1796년 7월 31일 프랑스 서부 방데(Vendee) 연안의 작은 섬인 누아르무티에(Noirmoutier)에서 의사인 아버지인 줄리앙 펠리티에(Julien Pelletier)와 어머니 안 무랭(Anne Mourain)의 딸로 태어나 로즈 비르지니 펠레티에(Rose Virginie Pelletier)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녀의 부모는 프랑스 혁명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감금되기도 했고, 혁명의 폭력을 피해 섬으로 피신해 살고 있었다. 그녀가 열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한 후 섬에서 수녀들이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다가 1810년 어머니의 결정으로 투르(Tours)의 기숙학교에 들어갔다. 4년을 기숙학교에 있으면서 집에도 가지 못하고 외로운 시간을 보내며 향수병에 시달리던 중 1813년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었다. 투르에서 성녀 마리아 에우프라시아는 기숙학교 근처에 있는 애덕의 성모 수녀회와 그들이 운영하는 보호소를 알게 되었다. 이 수녀회는 1641년 성 요한 외드(Joannes Eudes, 8월 19일) 신부가 매춘 여성과 그런 위험에서 빠져나온 이들과 착취당할 위험에 놓인 여성과 소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한 종교 단체였다. 그녀는 18살이 된 1814년 10월 20일 애덕의 성모 수녀회에 입회하여 수련을 시작했다. 그리고 1817년에 서원하면서 마리아 에우프라시아(또는 성녀 에우프라시아의 마리아)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1825년에 성녀 마리아 에우프라시아는 29살의 젊은 나이에 투르 수녀원의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 많은 수녀가 흩어지거나 감옥에 갇혔고 노령의 수녀들만 남았기 때문이었다. 원장으로서 그녀가 한 첫 번째 일은 매춘에서 벗어난 나이 많은 여성들이 기도와 노동을 중심으로 신앙적으로 생활하는 ‘막달레나 자매회’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1829년 성녀 마리아 에우프라시아는 앙제(Angers)에 수녀원을 설립해 달라는 주교의 요청을 받고 파견되어 ‘앙제의 착한 목자 애덕의 성모 수녀원’을 성공적으로 설립한 뒤 다시 투르로 돌아왔다. 그러나 2년 뒤에 앙제 수녀원이 자원 부족으로 운영의 어려움을 겪자 앙제의 주교는 투르의 주교를 설득해 성녀 마리아 에우프라시아에게 다시금 앙제 수녀원의 재건을 맡겼다. 1831년 그녀는 앙제 수녀원의 원장으로 선출되면서 투르를 떠났고, 앙제 수녀원을 재건하며 여러 도시에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었다. 또한 다른 수녀들이 수행하는 다양한 사회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도록 기도로 함께하는 관상 수녀 공동체를 설립했다. 성녀 마리아 에우프라시아는 경험을 쌓으면서 수녀회의 구조를 크게 변화시켜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각각의 공동체가 제각각 지역 주교들의 권위 아래 있다 보니까 전체적으로 새로운 성소자를 모집하고 교육 · 수련할 기회가 없었고, 그래서 세상의 다양한 요구에 확실히 대응하기가 어려웠다. 성녀 마리아 에우프라시아는 수녀회의 총장을 중심으로 전 세계의 수녀원들이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조직을 구상했으나 수녀원 내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녀는 야심이 많아 순종하지 못한다는 비난과 함께 ‘능력은 있으나 한 나라를 다스려야 직성이 풀릴 사람’이라는 평도 받았다. 그녀는 겸손과 결단력으로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마침내 앙제에 ‘착한 목자의 애덕의 성모 수녀회’(Congregation of Our Lady of Charity of the Good Shepherd)를 설립해 1835년 1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Gregorius XVI)에게 공식적인 승인을 받았다. 보통은 줄여서 ‘착한 목자 수녀회’(Sisters of the Good Shepherd)로 불리는 이 수녀회는 윤리적 위험에 처한 여성들을 위해 헌신하도록 설립되었으며, 총장 제도를 도입하라는 교황의 교서에 따라 기존의 애덕의 성모 수녀회와 구별되는 ‘착한 목자 수녀회’라는 국제연합수녀회로 거듭나게 되었다. 성녀 마리아 에우프라시아가 33년 동안 이 수녀회를 지도하는 동안 4개 대륙에서 110개의 수녀원과 3천여 명의 수녀들이 활동할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성녀 마리아 에우프라시아는 “한 영혼은 온 세상보다 더 소중합니다”라는 신념대로 단 한 명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녀는 수녀들에게 그 어떤 잘못을 저지른 소녀라도 절대 단죄하지 말라고 권고하며 더 넓은 마음을 가지도록 호소했다. 성녀 마리아 에우프라시아는 1868년 4월 24일 앙제에서 암으로 선종하였다. 그녀는 1933년 4월 30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40년 5월 2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녀가 설립한 착한 목자 수녀회는 현재 세계 곳곳에서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의 증거자가 되기 위해 버림받고 소외된 여성들, 절망 속에 있는 여성들과 미혼모와 가출 소녀 등 상처받은 여성들을 위한 사도직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4월 24일 목록에서 프랑스의 앙제에서 성녀 마리아 에우프라시아 펠레티에가 매춘 여성들을 자비롭게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 ‘막달레나회’라고 불렀던 착한 목자 수녀회를 설립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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