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대 바실리우스(Basilius Magnus, 또는 바실리오)는 부유하고 저명한 그리스도교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교회 역사상 가장 뛰어난 가문 중 하나로 불린다. 그는 329년경 카파도키아(Cappadocia, 오늘날 튀르키예 중부 아나톨리아 중동부를 일컫는 고대 지명)의 카이사레아(Caesarea)에서 태어나 네오카이사레아(Neocaesarea)의 성 그레고리오 타우마투르고(Gregorius Thaumaturgus, 11월 17일)의 제자이자 할머니인 성녀 마크리나(Macrina the Elder, 1월 14일)에게 신앙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박해를 피해 폰투스(Pontus) 사막으로 가서 살다가 박해 후에 카이사레아로 돌아와 신앙의 덕행을 물려준 아버지 성 바실리오(Basilius the Elder, 5월 30일)와 어머니 성녀 엠멜리아(Emmelia, 5월 30일)의 맏아들이었다. 그의 누나인 성녀 마크리나(7월 19일) 수녀원장과 동생인 니사(Nyssa)의 성 그레고리오(Gregorius, 1월 10일) 주교와 세바스테(Sebaste)의 성 베드로(Petrus, 3월 26일) 주교도 모두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어려서 심각한 병을 얻었던 그는 네오카이사레아 인근 이리스(Iris) 강변에 있는 가족의 사유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할머니와 어머니의 돌봄과 가르침을 받았다. 그 뒤에 카이사레아에서 아버지에게 수사학과 철학을 배우고 이어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과 아테네(Athenae)로 가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이곳에서 그는 나지안주스(Nazianzus)의 성 그레고리오(1월 2일)와 깊은 우정을 맺었다. 356년 고향으로 돌아와 교사로 지내던 그는 세례를 받고 복음의 정신대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할 결심을 하고 357년에 이집트, 팔레스티나, 시리아를 두루 여행하며 동방의 훌륭한 수도승들을 만나 수도 생활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358년에는 349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물려받은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 이리스 강변의 안네시(Annesi)에서 은수자로 정착하였다. 그의 누나인 성녀 마크리나도 강 맞은편에서 여자 수도 공동체를 지도하고 있었다. 그의 영성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이가 수도 생활을 위해 몰려왔다. 그중에는 아테네에서 사귄 나지안주스의 성 그레고리오도 있었다. 성 바실리오는 불과 5년 정도 수도 공동체와 함께 생활했을 뿐인데 동방 교회 수도원 제도와 전례의 창시자이자 수도 생활의 아버지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는 그가 누르시아(Nursia)의 성 베네딕토(Benedictus, 7월 11일)와는 달리 수도 규칙의 제정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영향이 동방 정교회의 수도 생활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주요한 원리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성 바실리오는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오(Eusebius) 대주교의 설득에 못 이겨 364년경 사제품을 받고 365년부터 주교를 도와 카이사레아 교구를 위해 일했다. 364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Arianism)를 지지하는 발렌스 황제가 권력을 잡으면서 교회가 어려운 시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365년부터 실질적으로 교구를 이끌었던 그는 370년 에우세비오 대주교가 선종하자 발렌스 황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후임 대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는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병원과 여행자와 순례자를 위한 숙소를 짓고, 수도원을 자주 방문해 그들의 질문에 명쾌한 답을 제공하였다. 이런 질의와 응답 내용은 훗날 “바실리오 규칙서”(Regula St. Basilii)로 재탄생했다. 그는 또한 온갖 협박과 회유로 아리우스 이단에 동조하도록 강요하는 발렌스 황제에 맞서 강론과 저서를 통해 니케아 공의회의 정통 교리를 수호하는 데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로 인해 모데스투스 집정관 앞에 끌려가 심문을 받기도 했다. 성 바실리오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했기 때문에 집정관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는 당황한 집정관에게 “당신이 아직 주교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오.”라고 대답했고, 집정관은 재산 몰수와 고문 또는 사형을 선고할 수 있다고 위협한 모든 것이 소용없음을 알고 그냥 돌려보냈다. 그의 또 다른 관심사는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일치였다. 그는 안티오키아(Antiochia)의 총대주교를 세우는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와 안티오키아 교구민들은 성 멜레시오(Meletius, 2월 12일)를 지지했으나 교황 성 다마소 1세(Damasus I, 12월 11일)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성 아타나시오(Athanasius, 5월 2일)는 바울리노(Paulinus)를 지지하였다. 성 바실리오는 교황과 여러 차례 서신을 주고받으며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374년에 교황이 바울리노를 임명하면서 점점 복잡해졌다. 378년 8월 9일 발렌스 황제가 사망하고 정통 교리를 따르는 테오도시우스 황제(379~395년 재위)가 등극하면서 교회 안에 평화가 정착되었다. 성 바실리오는 379년 1월 1일 카이사레아에서 선종했는데, 381년 개최된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성 멜레시오가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로 공인되면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서로 화해하였다. 성 바실리오는 초대 교회의 큰 거인이었다. 비잔틴 제국에서 아리우스파를 몰아낸 것이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를 단죄한 배경에는 성 바실리오의 영향력이 대단히 컸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가 네오카이사레아에서 제정한 규칙과 조직이 동방 수도 생활의 기초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그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다. 또한 그는 성직매매를 완강히 거절하고 가뭄의 희생자를 대대적으로 원조했으며, 훌륭한 성직자 양성을 위해 엄격한 성직자 법규를 만들고, 과감하게 악습을 끊어버리면서 카파도키아에서 만연한 매춘행위 관계자들을 파문하기도 했다. 그는 학식이 깊고 정치력도 있으며 성덕이 뛰어난 사람으로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설교가 중의 한 명으로 꼽힌다. 그의 해박한 저서들과 4백여 통의 편지들은 신학과 전례 등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성령의 ‘동일한 신성’을 역설한 “성령론”(De Spiritu Sancto)과 아리우스 신봉자인 에우노미우스를 반박하는 “에우노미우스 논박”(Adversus Eunomium) 그리고 나지안주스의 성 그레고리오와 함께 오리게네스(Origenes)의 작품을 선별해 편집한 “필로칼리아”(Philocalia)가 그중에서도 유명하다. 성 대 바실리오는 교회학자이자 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동생인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와 친구인 나지안주스의 성 그레고리오와 함께 ‘카파도키아의 3대 교부’로 불린다. 또한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수호한 신학자로서 알렉산드리아의 성 아타나시오와 콘스탄티노플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Joannes Chrisostomus, 9월 13일) 그리고 나지안주스의 성 그레고리오와 함께 동방 교회의 4대 교부 중 첫 번째로 꼽히는 인물이다. 보통 그의 이름 앞에 ‘대’(Magnus)라는 별칭이 붙는다. 1969년 보편 전례력 개정 전까지 가톨릭교회는 그의 축일을 6월 14일에 기념했었다. 옛 “로마 순교록”도 그날 목록에서 그의 업적에 대해 전해주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로마 보편 전례력 개정 이후 그리고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월 2일로 축일을 옮겨 그의 친구이자 교회학자인 나지안주스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와 함께 전례 안에서 기념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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