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박후재 요한(Joannes)은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는데, 1801년에 순교한 박 라우렌티우스(Laurentius)의 아들이다. 친척이 없어 외로웠던 그는 부친이 순교한 이후에는 서울로 올라와서 어머니와 함께 물장사도 하고 또 짚신장사를 해서 생계를 이어 갔다. 비록 가난한 생활을 하였으나 그는 마음은 대단히 곧았을 뿐만 아니라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신자의 모든 본분을 열심히 지킴으로써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래서 그의 아내는 후일 그에 대하여 감격적인 증언을 하였다. “그이는 평상시에 대단한 열심히 신자의 본분을 지켰고, 매우 부지런히 일을 하였으며, 내 영혼을 구하려면 치명을 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순교에 대한 열망에 차 있었다.” 또한 그는 주님을 사랑하고 극기하는 한 방편으로 짚신을 만들 때 쓰는 방망이로 정강이를 쳤으며, 영혼을 구하기 위해 육신의 곤궁을 어떻게 참아야 하는가를 성인 이야기를 통해 아내에게도 권고하였다고 한다. 기해년의 박해가 일어나자 박 요한은 아내에게 “교우들이 많이 붙잡혔으니 더욱더 조심합시다.” 하고 말하고, 질그릇을 40푼에 팔아 20푼은 아내에게 주어 그날 저녁으로 아내를 아주머니 집으로 먼저 보냈다. 아주머니 집으로 간 부인은 이튿날이 되도록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무슨 일을 당하지나 않았나 하는 생각에 사촌 오빠에게 청하여 탐문해 보니, 전날 밤 포졸들이 박 요한을 이미 잡아가고 없었다고 한다. 옥중에서 그는 수차례의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임금님이 이 교를 허락하시지 않는데 너는 임금님의 명령을 어기고 있다”라고 재판관이 말하자 그는 “천주는 저의 창조주시고, 당신을 사랑하시기를 명하십니다. 저는 임금님께보다도 천주께 더 복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천주교는 저에게 있어서 목숨보다 더 귀중한 것입니다. 천주님을 배반하기보다 차라리 저의 목숨을 버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공범자를 대라”는 포장의 말에는 “남을 해하는 일은 하지 못 하겠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았는데, 희광이가 그의 목을 여러 번 내리쳤으나 완전히 베지 못하자 칼을 돌에 대고 오랫동안 가는 동안 그의 몸은 무섭게 경련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런 후 희광이가 다시 그의 목을 쳐서 땅에 떨어뜨리니 그의 순교 열망은 성취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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