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노엘 피노는 1747년 12월 19일 프랑스 서부 앙제(Angers)에서 가난한 직조공의 16명의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고향에서 신학교에 입학해 1770년경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앙제 교구의 한두 본당에서 보좌신부로 사목하는 동안 병자들에 대한 지극한 정성으로 인해 존경받는 사제로 통했다. 1781년부터 그는 주로 불치병 환자들을 돌보는 앙제 병원 담당 사제로 활동하였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은 그가 병자들을 성인처럼 존경하고 아버지처럼 쓰다듬어 주었다고 증언하였다. 당시에 약도 음식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해 사실상 죽을 때까지 방치되던 이들에게 복자 노엘 피노 신부는 위로의 말뿐 아니라 최선을 다해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다. 그는 후원자들의 도움 외에 자신이 받는 모든 보수까지도 환자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가난한 이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실천한 복자 노엘 피노는 1788년 루루 베코네(Louroux-Beconnais) 성당의 주임사제로 임명받았다. 그 본당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 있었는데, 복자 노엘 피노는 스스로 본당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고 또 그렇게 살았다. 그의 열정과 신심은 결국 많은 영적 열매를 맺었다. 한편 프랑스 혁명(1789~1799년)이 발발하고 1790년 루이 16세(Louis XVI)에 의해 반포된 소위 ‘성직자의 시민 헌법’(Civil Constitution of the Clergy)은 가톨릭교회의 체제를 뿌리부터 흔드는 악법이었다. 다른 많은 성직자와 같이 복자 노엘 피노 신부도 끝까지 이 시민 헌법에 대한 선서를 거부했고, 이미 선서한 주교를 비난하여 본당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시민 헌법에 반대하는 교회 활동에 참여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지방법원에서 추방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그는 비밀리에 사제직을 수행하다가 성직자의 시민 헌법에 저항하는 가톨릭 세력과 왕당파가 일으킨 방데(Vendee) 지방 봉기가 어느 정도 성공한 1793년에 루루 베코네로 돌아와 공개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왕당파가 낭트(Nantes)에서 패한 후 그는 다시 은둔해야 했다. 복자 노엘 피노 신부는 1794년 2월 숨어지내던 본당 지역 내의 한 농장에서 미사를 봉헌할 준비를 마치고 제의를 다 입은 상태로 체포되었다. 그는 다시 시민 헌법에 대한 선서를 강요받았으나 거부하고 앙제로 압송되어 혁명 군사위원회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2월 21일 제의를 입은 상태로 대중 앞에서 미사의 시작 기도인 시편 42편을 외우며 단두대에 올라가 순교하였다. 그는 1926년 10월 31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2월 21일 목록에 그의 이름을 추가하면서 프랑스 앙제에서 본당 사제였던 복자 노엘 피노 신부가 프랑스 혁명 당시 미사를 준비하던 중 체포되어 조롱의 의미로 제의를 입은 상태로 단두대에 올라 희생되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는 나탈리스 피노(Natalis Pinot) 또는 나탈레 피노(Natale Pinot)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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