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에우스타티우스(또는 에우스타시오)는 270년경 팜필리아(Pamphylia) 지방 시데(Side, 오늘날 튀르키예 남부 지중해 연안의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성 아타나시오(Athanasius, 5월 2일) 주교가 증언한 대로 박해자 앞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용감히 고백하고 증거했을 뿐 아니라 학식이 뛰어나고 웅변에도 능했다. 그는 320년경 시리아 베로이아(Beroea, 오늘날 시리아 북부의 알레포[Aleppo])의 주교로 임명되어 큰 명성을 떨쳤다. 그는 아리우스(Arius)와의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325년에 니케아(Nicaea, 오늘날 튀르키예 북서부의 이즈니크[Iznik])에서 열린 공의회에 초대받기 얼마 전에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공의회에서 아리우스 이단과 오리게네스(Origenes)의 신학에 단호히 반대하여 큰 공의 세웠다. 하지만 공의회 이후에도 아리우스주의와의 다툼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아리우스주의에 물든 사제와 주교들과 맞섰고, 그러면서 그들의 모함과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황실의 지지를 받는 반대파들의 모함과 그들에게 매수된 매춘부의 거짓 증언으로 성 에우스타시오는 자신의 주교좌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아리우스파를 지원했던 콘스탄티우스 2세(Constantius II, 337~361년 재위) 황제는 추악한 소문에 대한 반대파들의 고발을 받아들여 몇몇 사제와 부제를 그와 함께 트라키아(Thracia, 발칸 반도 동부 지역으로 오늘날 그리스 영토와 튀르키예 영토로 나뉜다)로 추방하였다. 성 에우스타시오 주교는 교구를 떠나기에 앞서 신자들을 모아놓고 가톨릭의 정통 교리와 신앙을 충실히 지키도록 권고하고 겸손하게 유배에 올랐다. 그의 권고는 정통 신앙을 지지하는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아리우스파에 속한 그의 후임자를 거부하고 따르지 않는 이들이 별도의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교회 안팎으로 큰 소동이 일어났다. 그는 338년경 유배 중 선종했고, 482년에 그의 유해를 안티오키아로 이장하여 모셨다. 옛 “로마 순교록”은 7월 16일 목록에서 시리아 안티오키아의 주교인 성 에우스타시오가 아리우스파 황제인 콘스탄티우스 치하에서 가톨릭 신앙을 수호하다가 트라키아의 트라야노폴리스(Trajanopolis, 오늘날 그리스 북동부)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동방 정교회에서 기념하던 2월 21일로 그의 축일을 옮기고, 가톨릭 신앙을 수호했다는 이유로 아리우스파 황제인 콘스탄티우스 치하에서 트라키아의 투즐라(Tuzla, 오늘날 튀르키예의 이스탄불 동쪽 지역)로 유배되어 그곳에 선종했다고 기록하였다. 5세기의 유명한 교회 역사가인 키루스(Cyrus)의 테오도레트(Theodoret) 주교는 성 에우스타시오를 교회의 기둥이자 경건한 사람으로, 그리고 정통 교리를 위한 투쟁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성 아타나시오와 동등한 위상을 지닌 인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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