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다티우스(또는 다시오)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는 4세기 말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밀라노의 주교가 되기 전에는 수도승으로, 아마도 수도원장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는 530년경 밀라노의 주교가 되어 552년 선종할 때까지 주교직을 수행했는데, 재임 동안 끝없는 반목과 투쟁 속에서 때로는 영적인 문제보다는 세속적인 일에 대항하느라 시간 대부분을 써야 했다. 535~536년에 밀라노 지역에 끔찍한 기근이 닥쳤을 때 그는 친구이자 지사인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를 설득해 파비아(Pavia)와 토르토나(Tortona)에 비축해둔 식량을 굶주린 주민들에게 분배할 권한을 얻었다. 그는 동고트족(Ostrogoths)의 침략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보호하고 밀라노를 방어하기 위해 538년경 밀라노를 대표하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로마(Roma)로 가서 비잔틴 제국의 벨리사리우스(Belisarius) 장군과 동맹을 맺고 도움을 요청했으나 불행하게도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로마에 있는 동안 밀라노는 동고트족의 약탈로 폐허가 되었고,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으며, 결국은 539년에 항복하고 말았다. 결국 성 다시오 주교는 밀라노로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그 후 그는 교황 비질리오(Vigilius)를 동행해 콘스탄티노플로 갔고, 그곳에서 용감하게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일파와의 ‘삼장 논쟁’(三章論爭, The Three-Chapter Controversy)에 가담해 교황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삼장 논쟁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은 신성(神性)에 완전히 흡수되어 오직 인간이 된 신성밖에 없다며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하는 그리스도 단성론(單性論)을 받아들인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분열의 위기에 처한 제국을 일치시키기 위해 안티오키아의 신학자 3명을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ismus)로 단죄한 데서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세 명의 신학자들의 저술이 네스토리우스파를 옹호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하지만 비질리오 교황은 황제의 강압에 못 이겨 칙서를 승인했다가 서방 주교들의 강력한 항의에 직면해 승인을 다시 취소하였다(550년). 그는 동방과 서방 교회의 대립이 심화하고 교황직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 시기에 콘스탄티노플에 머물며 교황에게 황제와 맞서도록 촉구하며 많은 고초를 겪었다. 그리고 삼장 논쟁이 해결되기도 전인 552년 비질리오 교황과 함께 피신했던 칼케돈(Chalcedon, 오늘날 튀르키예 이스탄불의 아시아 해변의 카디쿄이[Kadikoy])이나 콘스탄티노플에서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나중에 밀라노로 옮겨져 산 비토레 성당(San Vittore al Corpo)에 묻혔다. 교황 성 대 그레고리오 1세(Gregorius I, 9월 3일)는 그의 “대화집”(Dialogi)에서 성 다시오 주교가 악령을 쫓아낸 일을 전해주었다. 그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에 종교 문제를 논의하러 콘스탄티노플로 여행을 떠났는데, 코린토스(Corinthos)에 도착했을 때 일행과 함께 머물 곳을 찾았으나 마땅한 데가 없었다. 마침 그곳에 오랫동안 악마의 괴롭힘으로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빈집이 하나 있었는데, 성 다시오가 그 집에 들어가 악령을 질타해 쫓아내고 묵었다고 한다. 옛 “로마 순교록”은 1월 14일 목록에서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 언급한 밀라노의 성 다시오 주교 이름을 전해주었고,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같은 날 목록에서 그리스도론과 관련한 삼장 논쟁에서 비질리오 교황의 입장을 옹호한 성 다시오 주교가 밀라노에서 추방되어 콘스탄티노플까지 교황을 동행하고 그곳에서 선종했다고 기록하였다. 그를 기념하는 1월 14일은 그의 시신을 밀라노의 성 빅토르 성당으로 옮겨 매장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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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성인명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수 |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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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다시오(1.14 ...] | 금주의 성인: 성 다시오 | 주호식 | 2025/01/15 | 32 |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