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토마스 홀랜드는 아마도 상류 계층에 속한 리차드 홀랜드(Richard Holland)와 앤(Anne)의 아들로 1600년 영국 잉글랜드 북서부 랭커셔(Lancashire)의 서튼(Sutton)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의 생토메르(Saint-Omer)의 예수회 대학에서 공부하다가 1621년 8월 에스파냐의 바야돌리드(Valladolid)의 영국 대학으로 옮겨 공부를 계속했다. 그는 프랑스어, 플라망어(벨기에 북부 지역에서 사용되는 네덜란드어), 에스파냐어 그리고 라틴어에 유창하였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도서관’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박식하였다. 1623년에 제임스 1세(James I) 왕의 아들인 찰스(Charles) 왕자가 결혼 문제로 에스파냐에 왔을 때 그가 대표로 뽑혀 마드리드(Madrid)에 가서 라틴어로 연설하기도 했다. 1624년 그는 플랑드르(Flandre) 지방으로 돌아와 예수회에 입회하고 와텅(Watten)에서 예수회 수련기를 마쳤다. 이어서 리에주(Liege)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품을 받은 그는 오늘날 벨기에 북서부 헨트(Gent) 지역에서 잠시 활동하고, 생토메르에서는 신학생들의 영적 지도를 맡기도 했다. 1634년 헨트에서 종신서원을 한 복자 토마스 홀랜드는 이듬해에 영국 선교 길에 올랐다. 그는 1635년 잉글랜드에 도착해 7년 동안 런던(London)과 고향 등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그는 가톨릭 사제의 사목과 선교활동이 금지된 상황이라 가명 등을 사용하며 비밀리에 움직였고, 다양한 언어에 능통했기에 때로는 외국인으로 행세하기도 했다. 1642년 10월 4일 런던 거리에서 체포되어 클러컨웰(Clerkenwell)에 있는 뉴 프리즌(New Prison)에 갇혔다가 뉴게이트(Newgate)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12월 7일 재판에서 ‘가톨릭 신자이고, 사제이며, 더욱이 예수회원’이란 죄목으로 반역죄 판결을 선고받았다. 12월 10일 토요일에 감옥으로 돌아온 그는 다음날인 주일과 월요일 미사를 감옥에서 봉헌할 수 있었다. 그러나 12월 12일 그의 마지막 미사는 처형장인 타이번(Tyburn)으로 이어졌다. 그는 처형장에 모인 많은 이들 앞에서 설교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한 후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복자 토마스 홀랜드는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순교한 날인 12월 12일에 축일을 기념했었다. 그런데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그의 전례적 기념일을 12월 22일로 옮겨 영국 런던에서 예수회 신부인 복자 토마스 홀랜드 신부가 은밀히 직무를 수행하다가 찰스 1세 치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을 당해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께 바쳤다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복자 토마스 홀랜드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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