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또는 폴리카르포)는 젊은 시절 사도 성 요한(Joannes, 12월 27일)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스승으로부터 주님의 가르침에 대해 충실히 전해 들은 그는 사도 성 요한에 의해 소아시아 서해안의 항구도시인 스미르나(오늘날 튀르키예의 이즈미르[Izmir])의 주교로 축성되었다. 스미르나와 인근 지역인 에페수스(Ephesus)는 이미 사도 성 바오로(Paulus, 6월 29일)가 전교한 곳으로 신자가 많이 있었다. 성 폴리카르포의 제자이자 나중에 리옹(Lyon)의 주교가 된 성 이레네오(Irenaeus, 6월 28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스승에 관해 짧은 전기를 전해주었다. 카이사레아(Caesarea)의 에우세비우스(Eusebius)는 그의 저서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에서 성 이레네오가 쓴 전기를 보충하여 설명해주었다. “나는 복된 폴리카르포가 앉았던 자리와 가르쳤던 자리, 드나들던 장소, 그의 모든 행동과 외모, 사람들 앞에서 행한 연설을 당신(플로리누스)에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가 요한과 주님을 본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교제하고 그들의 말을 어떻게 인용하였으며, 그들에게서 주님과 그분의 기적과 가르침에 관하여 무엇을 들었는지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폴리카르포는 로고스(말씀)의 삶을 목격한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은 대로 모든 것을 성경과 일치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성 폴리카르포는 사도적 권위를 지닌 사도교부(使徒敎父)로 불린다. 성 이레네오는 스승인 성 폴리카르포가 여러 통의 편지를 썼다고 전해주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서간은 14장으로 된 “필리피인들에게 보낸 편지”뿐이다. 성 폴리카르포가 쓴 편지의 주제는 ‘의로움’이었다. 그는 의로움을 바탕으로 윤리와 도덕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삶을 북돋우고자 했다. 그래서 금전에 대한 욕심, 탐욕, 중상, 거짓 증언과 불의를 멀리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사도들로부터 전해 받은 정통 교리의 열렬한 수호자로서 특히 이단인 발렌티누스주의(Valentinianism)와 마르키온주의(Marcionism)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는 필리피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요한의 첫째 서간 4장 3절,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하지 않는 영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적’의 영입니다. 그 영이 오리라고 여러분이 전에 들었는데, 이제 이미 세상에 와 있습니다.”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사탄의 맏이’라고 부른 마르키온의 거짓 가르침을 반대하도록 역설하였다. 그는 또한 안티오키아(Antiochia)의 주교이자 사도 교부로서 존경받는 성 이냐시오(Ignatius, 10월 17일)와 주교단의 일원으로서 또 각별한 선후배 주교로서 가까이 지냈다. 성 이냐시오가 안티오키아에서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는 여정 중에 스미르나에서 성 폴리카르포와 마지막 만남을 가졌다. 성 이냐시오는 압송 중 성 폴리카르포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배 주교로서 후배 주교에게 사목자로서 지녀야 할 자세와 덕목을 설명해주었다. 그는 생애의 말기에 로마에 가서 교황 성 아니체토(Anicetus, 4월 17일)를 방문하고 그곳의 많은 이단자를 교회로 인도하였다. 사실 성 폴리카르포가 로마를 방문한 주된 이유는 주님 부활 대축일 날짜에 대한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이견 때문이었다. 당시 소아시아 중심의 동방 교회는 서방의 관례와는 달리 사도 성 요한과 다른 사도들이 행한 전통에 따라 과월절 전날인 니산(Nisan) 달 14일에 부활 대축일을 기념하였다. 반면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 교회는 과월절 당일이나 과월절 다음 일요일, 즉 춘분이 지나고 첫 만월 다음에 오는 일요일에 부활 대축일을 지냈다. 비록 그때의 방문으로 부활 대축일 날짜 조정 문제의 이견을 좁히지 못해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소아시아 교회를 대표해서 간 성 폴리카르포와 로마의 주교인 교황 성 아니체토 사이의 교회 공동체성은 깨지지 않았다. 이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교회가 분열될 수도 있는 중요한 신학 문제였으나 서로의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해 분열의 길로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뒤로도 부활절 날짜 논쟁은 많은 논란을 겪다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모든 교회가 로마의 관례에 따라 부활 대축일을 지내야 한다는 규정을 교령으로 결정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로마 방문을 마치고 스미르나로 돌아온 성 폴리카르포는 155년 또는 156년 2월 하순, 80대 중반의 나이에 체포되어 총독 앞에 섰다. 171년 이후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폴리카르포 순교록”(Martyrium Polycarpi)이 그의 영웅적인 순교 장면을 전해주었는데, 이는 스미르나 교회가 필로멜리움(Philomelium) 교회에 보낸 서간 형식으로 기록한 목격 증인의 글로 매우 귀중한 자료로 손꼽힌다. 그에 따르면 원형 경기장에서 함께 체포된 여러 신자가 순교한 후 성 폴리카르포 주교 차례가 되어 그 지방 총독인 스타티우스 콰드라투스(Statius Quadratus) 앞에 섰다. 총독은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고 신성한 황제를 숭배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하였다. 하지만 그는 “내가 86세가 되도록 섬겨온 그분은 나의 왕이며 구세주이시고 또 나를 조금도 해치지 않으신 분이신데 어떻게 배반할 수 있겠는가!” 하며 단호히 거부하였다. 총독은 그를 화형에 처하도록 명령하고 군중은 장작더미를 쌓아 올렸다. 의복을 벗고 스스로 장작더미 위로 올라간 그는 뜨거운 불길에 요동칠까 봐 기둥에 못 박으려는 병사들에게 “염려 말게. 이 불을 견딜 힘을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못 박지 않아도 장작불 속에서 버티어 낼 힘을 나에게 주실 것이네.”라고 안심시킨 후 당당히 순교하였다. 신자들은 불에 탄 그의 뼈를 모아 적당한 장소에 안장하고 순교자로서 공경하였다. 성 폴리카르포의 순교 시기와 날짜는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다. 옛 “로마 순교록”은 1월 26일 목록에서 사도 성 요한의 제자이자 스미르나의 주교이며 소아시아 지방의 대표인 성 폴리카르포가 신앙 때문에 화형을 선고받고 원형 극장에서 불길에 휩싸였으나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아 칼에 찔려 순교했는데, 이때 필라델피아(Philadelphia, 오늘날 튀르키예의 알라셰히르[Alasehir]에 있었던 고대 도시)에서 온 12명의 신자도 그와 함께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그런데 1969년 로마 보편 전례력을 개정하면서 그의 축일을 동방 정교회에서 기념하는 날과 같은 2월 23일로 변경했고,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2월 23일 목록에서 그의 영웅적인 순교 장면을 전해주었다. 사도 성 요한의 제자이자 사도 시대의 마지막 증인으로 존경받는 성 폴리카르포 주교가 스미르나에서 총독과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90세가 다 된 나이에 화형을 당해 순교자의 반열에 들었고,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렸다고 기록하였다. 성 폴리카르포는 사도 교부의 한 사람으로서 2세기 그리스도교의 최고 지도자였으며, 사도 시대와 그 이후 그리스도교의 뛰어난 저술가 사이를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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