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힐라리우스(Hilarius, 또는 힐라리오)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어서 성 예로니모(Hieronymus, 9월 30일)의 “명인록”(De viris illustribus)에 언급된 그의 작품들을 통해 추정할 수밖에 없다. 그에 따르면 성 힐라리오는 310~320년 사이에 프랑스 중서부 푸아티에의 이교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철학과 수사학 등 좋은 교육을 받으며 성장해 푸아티에에서 고위 관리가 된 듯하다. 그리고 젊은 나이에 결혼했으나 그의 아내나 결혼 생활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는 결혼 후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는데, 그 이유를 쾌락 생활의 한계와 철학자들의 모순에 환멸을 느끼던 중 자신이 갈구하던 영원한 생명에 대한 목마름을 성경 안에서 찾았다고 한 저서에서 밝혔다. 그는 성경 안에서 사람이 되신 말씀을 알게 되었고, 사도 성 바오로(Paulus)의 서간을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하고 뒤늦게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는 세례를 받은 뒤에 가족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했고, 푸아티에에서 존경받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다. 350년경 푸아티에의 주교가 선종하자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성 힐라리오를 후임 주교로 선출하였다. 그는 더는 사양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고향 푸아티에의 주교로 축성되었고, 아내 또한 그를 떠나 금욕 생활에 들어갔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334년에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성 아타나시오(Athanasius, 5월 2일) 주교가 아리우스파의 압력으로 트리어(Trier)로 추방되고, 337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사망한 후 아리우스 논쟁은 더욱 확산하여 제국의 절반이 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성 힐라리오는 공개적으로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갈리아 지역에서 영향력 있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결국 성 힐라리오는 356년 아리우스파가 주도한 베지에(Beziers) 교회 회의에서 단죄되었고,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던 서로마 제국의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337~361년 재위)에 의해 오늘날 튀르키예에 속한 소아시아 중서부 지역인 프리지아(Phrygia)로 추방되었다. 그런데 4년에 걸친 성 힐라리오의 유배 생활은 오히려 그가 문화적 · 신학적으로 크게 성장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는 서방 교회의 주교로서 동방 교회에 머물며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학 논쟁, 특히 아리우스 논쟁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그는 유배 중에 상대적으로 제한된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그는 갈리아 지역의 주교들과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고, 그리스어로 기록된 저술가들의 작품을 접하면서 자신의 영성과 성경 이해에 큰 도움을 준 오리게네스(Origenes)의 신학을 받아들였다. 성 힐라리오가 푸아티에의 주교직에 복귀하지 않는 조건으로 갈리아로 돌아왔을 때,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가 사망하고 아리우스 논쟁에서 중립을 유지하던 배교자 율리아누스(361~363년 재위)가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새로운 환경에서 성 힐라리오는 자신의 신학적 노선을 추구할 수 있었고, 갈리아 지역과 북이탈리아 지역에서 아리우스주의를 청산하고 정통 교리를 지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의 저서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작품은 유배 중에 집필한 “삼위일체론”(De Trinitate)이다. 12권으로 된 이 책에서 그는 삼위일체 논쟁에서 성부수난설(聖父受難說)을 주장한 사벨리우스주의(Sabellianism)나 아리우스주의(Arianism)에 반대하는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분명하게 밝혔다. “삼위일체론”은 아리우스주의와 벌인 논쟁에서 동방과 서방의 신학을 결합한 서방 교회 최초의 작품이다. 성 힐라리오는 생애 말기에 신학 작품 외에도 전례에 찬가를 도입하였고, 그의 제자이자 후에 투르(Tours)의 주교가 된 성 마르티노(Martinus, 11월 11일)와 함께 갈리아 지방에서 수도원 제도를 장려하였다. 그는 또한 성경 주석 작품으로 “마태오 복음 주석”과 “시편 주석”도 저술하였다. 그는 367년 또는 368년 11월 1일 또는 1월 13일에 선종했다고 하는데, 정확한 연도나 날짜를 알 수는 없다. 그에 대한 마지막 역사적 사건이 367년에 있었기에 대체로 367년에 선종한 것으로 보고 있고, 오래된 순교록에 두 날짜가 모두 나오기에 둘 중 하나는 유해를 이장한 날로 추정하고 있다. 히포(Hippo)의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8월 28일)는 그를 ‘교회의 빛나는 교사’요 ‘이단에 맞선 진리의 가장 열렬한 옹호자’라고 칭송하였다. 성 예로니모는 그를 ‘매우 웅변적인 사람’이자 ‘교회의 큰 보물’이라고 했다. 라틴 교부의 한 명이자 ‘서방 교회의 아타나시오’로 불리는 성 힐라리오는 1851년 5월 13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1월 13일 목록에서 프랑스 푸아티에의 주교이자 증거자인 성 힐라리오가 선종했는데, 그는 용감하게 가톨릭 신앙을 수호하다가 4년간 프리지아로 추방당했었고, 그곳에서 한 사람을 죽음에서 살리는 기적을 행했으며,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교회 박사로 선포되었다고 소개하며 그의 축일을 1월 14일에 기념한다고 전해주었다. 1969년 로마 보편 전례력 개정 이전까지 그의 축일을 1월 14일에 기념했었는데, 이는 1월 6일에 기념하는 주님 공현 축일(한국 교회에서는 1월 2~8일 사이에 오는 주일에 지낸다) 8일 축제 마지막 날(13일)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전례력 개정 정신에 따라 그의 축일을 1월 13일로 옮기고, 주교이자 교회학자인 성 힐라리오가 아리우스 이단의 추종자였던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 치하에서 푸아티에의 주교가 되었고, 자신의 저서를 통해 삼위일체의 신비와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니케아 공의회의 신앙을 강력히 옹호했으며, 그로 인해 4년간 프리지아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시편과 마태오 복음에 대한 유명한 주석서를 집필했다고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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