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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문도(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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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라이문도 (Raymund)
축일 1월 7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총장, 신부
활동지역 페냐포르트(Penafort)
활동연도 1175?-1275년
같은이름 라이문두스, 레이먼드, 레이몽
성인 기본정보

   성 라이문두스(Raymundus, 또는 라이문도)는 1175년경 에스파냐 북동부 카탈루냐(Cataluna) 지방의 페냐포르트 성(城)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라곤(Aragon) 왕가와 친척 관계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었고, 바르셀로나(Barcelona)의 주교좌성당 부속 학교에서 공부한 후 20살의 젊은 나이에 이미 그곳 대학에서 논리학과 수사학 교사로 활동할 정도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 후 그는 이탈리아의 볼로냐(Bologna) 대학으로 가서 8년 동안 법학을 공부하고 1218년 교회법과 민법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그곳에서도 강의했다. 주교의 명을 받고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그는 사제품을 받고 1219년에 참사회원이 되었고, 1222년에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 그는 성 베드로 놀라스코(Petrus Nolasco, 1월 28일)가 ‘노예 해방을 위한 속량의 성모회(메르체다리오회, Mercedarian Order)를 설립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 수도회는 에스파냐 남부와 북아프리카에서 무슬림에 의해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돈을 내고 구출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미 바르셀로나와 볼로냐에서 학문 연구와 풍부한 강의 경험을 지니고 있던 성 라이문도는 1230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Gregorius IX)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가서 교황궁 고해 사제와 교황청 내사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신학교와 대학교의 교과서로 사용하기 위해 그때까지 반포된 역대 교황들의 교령을 모두 수집하라는 교황의 명을 받고 이를 수행하였다. 그는 수집한 것을 묶어 “그레고리오 9세 교령집”(Decretales Gregorii IX)을 편찬하였다. 이 교령집은 1234년 교황 칙서로 공포되었고, 1917년까지 거의 700년 가까이 교회법의 표준 교과서처럼 사용되었다.

   성 라이문도는 1235년 아라곤 왕국의 수도인 타라고나(Tarragona)의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다음 해에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오로지 설교 임무에만 전념하였다. 명예에 관심이 없었던 그는 1238년에 볼로냐에서 열린 총회에서 동료 회원들의 추대로 도미니코 수도회의 제3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순종의 정신으로 총장직을 받아들인 그는 설립자인 성 도미니코(Dominicus, 8월 8일)가 적용한 관습을 보존하면서도 설교자회로서의 도미니코회 회헌을 개정하였다. 2년의 총장직을 마치고 다시 에스파냐 바르셀로나의 성녀 가타리나 수도원으로 돌아온 그는 이슬람교의 확산을 막기 위해 여생을 무슬림과 유대인의 개종을 위해 헌신하기로 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성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 1월 28일)를 격려하여 “대이교도대전”(對異敎徒大全, Summa Contra Gentiles)을 쓰도록 했고, 도미니코회 학교에서 히브리어와 아랍어 학과를 설치하도록 했다. 선교사들이 무슬림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아랍어와 쿠란(Quran)을 배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첫 저서는 1222년 도미니코회에 입회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장상의 명으로 시작해 1229년까지 바르셀로나에서 작업해 저술한 “고해성사 사례 대전”(Summa de casibus poenitentiae) 4권이다. 그 밖에도 그는 교회법에 대한 많은 권위 있는 교과서들을 저술했고, 그 저서들은 후대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100세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위한 생애를 살았던 성 라이문도는 1275년 1월 6일 선종하였다. 그의 시신은 처음에 바르셀로나의 가타리나 수도원 성당에 안치되었다가 1838년에 바르셀로나의 주교좌성당으로 옮겨졌고, 1879년부터 성 라이문도 경당 제단 아래 안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교회법 연구의 기초를 놓은 공로로 교회법 학자의 수호성인이 된 그는 1601년 4월 29일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1671년에 1월 23일에 기념하도록 로마 보편 전례력에 추가되었으나 1969년 전례력을 개정하면서 선종 다음 날인 1월 7일로 변경하여 기념하게 되었다. 선종한 날인 1월 6일은 이미 주님 공현 대축일로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옛 “로마 순교록”은 1월 7일과 23일 목록에서 바르셀로나에서 성덕과 학문으로 유명한 설교자회 신부인 페냐포르트의 성 라이문도를 기념하는데, 축일은 1월 23일에 거행한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969년 로마 보편 전례력 개정의 정신을 반영해 1월 6일 목록에서 에스파냐 바르셀로나에서 다음날 축일을 거행하는 페냐포르트의 성 라이문도를 언급하고, 1월 7일 목록에서 설교자회 신부인 성 라이문도가 저명한 교회법 학자로서 고해성사에 관해 올바르고 유익한 책을 저술했고, 수도회 총장으로서 새로운 회헌의 초안을 준비했으며, 노년에 바르셀로나에서 주님 안에 경건하게 잠들었다고 기록하였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자신의 긴 망토를 이용해 바다를 항해하는 모습으로 종종 표현된다. 이는 그의 관련한 가장 유명한 기적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성 라이문도가 아라곤의 왕 제임스 1세(James I)의 고해 사제로 있을 때 무슬림의 개종을 위해 마요르카섬(Mallorca Is.)에 간 적이 있었다. 왕은 그를 돕기 위해 방문하면서 아내가 아닌 다른 여인과 함께 왔다. 성 라이문도는 왕의 잘못된 행동을 비판했으나 왕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왕과 함께 더는 머무를 수 없다며 바르셀로나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화가 난 왕은 그가 섬을 떠나는 것을 금지하고 그의 출발을 돕는 선장도 처벌하겠다고 위협했다. 성 라이문도는 해변으로 가서 하느님께 기도한 후 자신의 망토를 바닷물에 적셔 지팡이를 이용해 돛대처럼 만들고 그 위에 올라타 바르셀로나까지 무사히 바다를 건너갔다. 많은 이들과 선원들이 그 모습을 보고 놀라워했고, 이에 두려움을 느낀 제임스 1세 왕도 참회하고 올바른 길을 걸었다고 한다.♣

참고자료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상) - '페냐포르트의 성 라이문도 사제',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149-151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3권 - '라이문도, 페냐포릇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6년, 2034쪽.
  •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성라이문도', 서울(성바오로), 2002년, 24-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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