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박종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또는 아우구스티노)는 서울에 살던 중인 계급의 신자 집에서 태어났으며 ‘이선’이라고도 불렀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친절하였으며, 학문에도 뛰어나고 박학하였으므로 주변의 칭찬을 들으며 자랐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극빈한 가운데서 살았으나 자신의 처지를 불평 없이 참아 받았고, 어머니께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며, 교회의 계명도 충실히 지켜나갔다고 한다. 나이가 들자 그는 순교자의 딸인 고순이 바르바라(Barbara)를 아내로 맞이하여 열심한 신앙생활로 모범 가정을 이루는 한편, 그의 박애심과 교리 지식을 활용하여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데 전심하였다. 그는 가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 주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셨으니 불쌍한 죄인인 나도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괴로움을 당하고 죽으셨으니, 나도 그분을 위하여 괴로움을 받고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면서 순교하려는 뜻을 마음에 새겼다. 또 그는 신자들 중에서 무슨 악습이나 부당한 일이나 중대한 과실을 발견하면 상냥한 말로 그 사람을 회개시키려고 노력하였는데. 감동할 만큼 사랑으로 권고했기 때문에 그의 충고에 거역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리고 그의 온화함이 널리 알려져 신자들은 웃으며 “대관절 아우구스티누스가 성을 내는 것을 언제 보게 될까?” 하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덕과 재능을 즉시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에게 알려졌다. 따라서 주교는 그를 서울의 회장직에 임명하였고, 그는 이 위험한 직책을 열성적으로 수행하여 그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시작되자 포청에서는 그를 첫 번째 체포 대상자로 지목했음으로 그는 자기 집을 떠나 친구의 집에 피신하였으나, 회장의 직분을 다하려는 마음에서 밤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신자들을 찾아보고 그들을 위로하며 용기를 북돋아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8개월을 지내던 중 마침내 10월 26일에 아내와 함께 체포되었다. 형조판서는 부부를 함께 심문하며 여섯 차례나 계속하여 잔인하게 고문하여 그들의 팔 다리를 못 쓰게 만들었다. 10일 후에 형조로 끌려간 그는 다리에 매를 맞아 살점이 떨어져 나갔으나 그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리하여 그는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그의 죄목은 “천당과 지옥을 마치 확실한 사실같이 말하고, 제사는 헛된 예식이라 하여 저버렸으며, 천주를 충심으로 믿고 공경하여 차라리 죽을지언정 마음을 돌리지 않은 죄”였다. 그는 1840년 1월 31일, 서울에 있는 당고개에서 참수를 당하여 순교하였고, 이때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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