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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 포천 순교성지(복자 홍인 레오 순교터, 포천 성당)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복자 홍교만과 홍인 부자의 순교 정신이 살아 있는
지번주소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 723-3 
도로주소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호국로 1564
전화번호
팩스번호 (031)534-8988
홈페이지 https://cafe.daum.net/pccatholicchurch
관련기관 포천 성당    (031)534-0057
관련주소 경기도 포천시 왕방로 191
문화정보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71호(포천 성당 옛 성당)
복자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738-1801년)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한양 출신으로, 훗날 경기도 포천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지내고 있었으며, 그도 높은 벼슬을 지낸 맏형과 함께 일찍부터 학문에 힘써 진사가 되었다. 1801년에 순교한 홍인 레오는 그의 아들이며, 같은 해에 순교한 정철상 가롤로는 그의 사위이다.

포천으로 이주해 사는 동안, 홍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양근에 사는 고종사촌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집을 드나들다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신앙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먼저 천주교에 입교한 아들 홍인에게서 교리에 대해 자세히 들은 뒤, 이것이 바로 자신이 찾던 진리라는 것을 깨닫고는 실천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1794년 말 주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홍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주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석하였다. 그런 다음 비신자 친구들과의 교제를 끊고, 자신의 학식을 이용하여 더 깊이 교리를 연구하였다. 또 글을 잘 알지 못하는 신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냉담자를 회두시키거나 교리를 알고자 찾아오는 이들을 권면하는 데 열중하였다. 포천 지역에 복음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은 그의 이러한 열성 때문이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마자, 홍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사돈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책 상자를 자신의 집에 숨겨 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 신자가 이 상자를 다른 곳으로 옮기다가 박해자들에게 발각되었고, 이내 그의 이름도 박해자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아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스스로 오래 피할 수 없음을 알고는 집으로 돌아왔고, 오래지 아니하여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2월 14일, 홍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곧장 의금부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어떠한 위협에도 전혀 굴하지 않았으며, 박해자들 앞에서 끊임없이 ‘천주교 교리가 진리’라는 것을 설명하였다. 실제로 박해자들이 오히려 그의 용감한 태도에 놀랄 정도였다.

“하느님은 천지의 큰 부모가 되시니, 어찌 큰 부모를 섬기지 않겠습니까? 또 큰 부모를 섬기는 천주교를 감히 사악한 종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천하의 진리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사악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후에도 홍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끊임없이 배교를 강요당하였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박해자들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홍인 레오(1758-1802년)

홍인(洪鏔) 레오의 집안은 본디 한양의 이름 있는 집안이었으나, 그의 부친이 경기도 포천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1801년 한양에서 순교한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바로 그의 부친이다.

홍 레오의 가족이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1791년경 그의 부친이 양근 땅에 살던 고종사촌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교리를 배우면서였다. 홍 레오는 부친에게서 교리를 배웠는데, 오히려 부친보다 먼저 천주교 신앙을 진리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천주교에 입교한 뒤 홍 레오는, 세속의 꿈을 모두 버리고 하느님을 섬기고 교리를 전하는 데에만 열중하였다. 그러면서 효성을 다하는 길은 부친을 신앙으로 이끄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그는 부친의 의심을 풀어 드리고, 입교를 망설이는 부친을 설득하여 마침내 부친을 신앙으로 이끄는 데 성공하였다.

1794년 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홍 레오는 부친과 함께 주 야고보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서오촌(庶五寸) 당숙인 홍익만 안토니오, 황사영 알렉시오 등과 함께 교류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또 부친과 같이 포천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도 노력하였다.

1801년에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홍 레오는 부친과 의논하여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책 상자를 받아 집 안에 숨겨 두었다. 그런데 한 신자가 이 상자를 다른 곳으로 옮기다가 체포되면서 그들 부자의 이름이 박해자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 무렵 홍 레오와 부친은 다른 곳으로 피신해 있었다. 그러나 오래 숨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곧 집으로 돌아왔으며, 바로 그때 포졸들이 쳐들어와 그들 부자를 체포하였다. 이후 부친 홍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한양으로, 홍 레오는 포천으로 각각 압송되었다.

이윽고 홍 레오는 포천에서 첫 번째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밀고하지 않고 신앙을 굳게 지킨 뒤, 경기 감영을 거쳐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그에 앞서 홍 레오의 부친은 한양으로 압송된 지 얼마 안 되어 형벌을 받고 순교하였다. 홍 레오도 그 뒤를 이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으나 신앙으로 극복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고향 포천으로 이송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형조에서 홍인 레오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너는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오랫동안 이를 믿어 왔다. 너의 아버지가 교리를 가르치고 너는 이를 배웠으며, 깊이 여기에 빠져 (교리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으므로 경기 감영에서 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 네가 저지른 죄의 실상을 보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홍인 레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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