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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사 전례 음악 어떻게 준비할까? (4) 성찬 전례와 음악 (2)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6-02-07 조회수1,515 추천수0

미사 전례 음악 어떻게 준비할까? (4) 성찬 전례와 음악 (2)

 

 

한국교회의 미사 전례 음악 중 가장 큰 문제는 ‘영성체 성가’의 사용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필자는 영성체 예식을 두 번에 걸쳐 살펴보려고 하는데 이번 호에서는 영성체 예식을 구성하고 있는 ‘주님의 기도’, ‘평화 예식’, ‘하느님의 어린양’, ‘영성체’를 다루고, 다음 호에서는 현재 한국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가톨릭 성가」에 실려있는 영성체 노래들을 나름대로 분석하여 과연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많은 영성체 성가들이 그 봉사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는 올바른 것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1. 영성체 예식

 

1) 주님의 기도 

 

영성체 예식은 ‘주님의 기도’로 시작한다. 빵, 용서, 그리고 상호간의 평화라는 주제를 가진 이 기도는 4세기 말엽부터 영성체를 준비하는 가장 이상적인 기도로서, ‘빵 나눔’ 의식 직후(현행 미사의 ‘하느님의 어린양’)에 바쳤다. 그러나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590-604년)는 이 기도를 성찬기도와 밀접하게 연결된 것으로 판단하여 ‘빵 나눔’ 의식 이전, 곧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동방교회에서는 이 기도를 모든 신자가 노래한 것에 비해, 서방교회에서는 사제만이 이 기도를 노래하고 신자들은 ‘아멘’으로 응답했다. 

 

“주님의 기도에의 초대, 주님의 기도, 후속 기도와 백성이 마감하는 영광송은 노래하거나 큰 목소리로 바치게 되어있다”(2002년 「로마 미사 전례서 총지침」, 81항 참조; 이하 「총지침」). 그러나 전례 음악적으로 보아 ‘주님의 기도’는 노래로 하기보다 큰 소리로 바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영성체 예식의 핵심 부분은 성체를 모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기도’는 영성체를 준비하는 기도이기에 이 노래를 너무 거창하게 노래하는 것은 전례의 흐름상 어색하다. 어쨌든 주님의 기도를 노래로 한다면 단순한 곡을 모든 신자가 암기하여 노래 부를 수 있으면 가장 이상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만약 ‘주님의 기도’를 노래로 불렀다면 후속 기도(“주님, 저희를 모든 악에서 구하시고…”) 다음에 따라오는 영광송(“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역시 노래로 불러야 한다. 왜냐하면 영광송은 주님의 기도의 한 부분처럼 사용되기 때문이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자고 초대하는 사제는 그날 미사 전례의 성격, 공동체의 크기에 맞는 권고를 하면 좋겠다. 특별히 ‘주님의 기도’를 노래로 할 경우, “형제자매 여러분, … 정성들여 노래합시다.” 등으로 바꾸어 초대해 준다면 신자들이 큰 소리로 기도문을 시작하는 등의 혼돈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2) 평화 예식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시오.”라고 부제(부제가 없을 때에는 사제)가 초대하면 신자들은 앞뒤 좌우의 몇몇 분들과 절도 있는(sobrie) 적당한 행동(「총지침」, 82항)으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게 되는데, 이때 노래는 필요 없다. 간혹 젊은이 미사에서 긴 시간 동안 ‘Shalom’을 노래하며 평화의 인사(이른바 윤회 인사)를 하는데 특별한 경우, 예를 들어 피정 등을 제외하고는 전례 정신에 맞지 않다. 이 부분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평화 예식을 나누는 것이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 하느님의 어린양

 

사제가 축성된 빵을 나누고 성작 안에 넣을 때 성가대나 선창자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노래하거나 큰 소리로 낭송하고 회중들은 화답한다(「총지침」, 83항). 이 노래는 7세기경에 세르지오 1세 교황(687-701년)이 동방교회에서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제가 빵을 나누는 동안 전 회중이 계속하여 이 노래를 부르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8-9세기부터 작은 빵이 등장하고, 이제 더 이상 빵을 나눌 필요가 없게 되자 여러 번 반복하던 노래를 세 번으로 한정시켰다. 이에 따라 ‘빵 나눔’을 동반하던 이 노래가 빵 나눔과는 상관없는 독자적인 예식으로 변하게 되었고, 결국 평화 예식 때에 부르는 노래, 심지어는 주례 사제가 성체와 성혈을 영하는 동안 부르는 영성체 노래로 생각되기에 이르렀다. 

현행 전례는 이 노래를 그 기원과 내용에 알맞게 사제가 빵을 나누는 동안 신자들이 부르는 성가로 환원시켰다. 일반적으로는 세 번 하지만 ‘빵의 나눔’을 동반하는 기도이므로 예식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여러 번, 필요한 횟수만큼 반복할 수 있다. 다만 이 노래를 마칠 때에는 ‘평화를 주소서.’로 끝내야 한다(「총지침」, 83항).

 

4) 영성체

 

영성체를 위한 준비 예식이 모두 끝나면 이제 영성체 예식의 본 부분인 사제와 신자들의 영성체가 시작된다. 사제와 신자들의 영성체는 하나의 예식이기 때문에 사제가 성체를 모시기 시작할 때 영성체 노래를 시작한다. 간혹 본당에서 사제의 영성체 때에는 ‘영성체송’을 읽고, 그 후에 또는 신자들의 영성체 때에는 노래를 부르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이는 중복이므로 입당송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영성체 때에 노래를 부른다면 「미사 전례서」에 나오는 ‘영성체송’은 할 필요가 없다. 노래로 하지 않을 경우에만 영성체송을 낭송한다(「총지침」, 87항).

 

이제 우리는 ‘영성체 성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찬례의 목적과 의미는 그리스도와 신자 각 개인 그리고 거기에 참석한 신자들 상호간에 이루는 일치에 있다. 사제는 신자들에게 성체를 들어 보이면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한다. 이는 단순히 축성된 그 빵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빵을 먹는 사람들도 함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치의 신비를 나타내는 데 음악의 봉사적 기능은 상당히 중요하다. 신자들이 성체를 모시러 제단으로 줄을 서서 함께 나아가는 행렬이 지닌 친교적인 일치감을 형성하는, 시각적이고 동적인 힘을 강화시켜 주는 음악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영성체 노래의 봉사적 기능을 무시하고 단순히 성체를 찬미 또는 흠숭하는 노래는 사용할 수가 없다는 것을 이제 확실히 알아야겠다. ‘영성체 성가’라 하기보다 ‘영성체 행렬 노래’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며, 설령 줄여서 ‘영성체 노래’라고 부르더라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성체를 찬미 또는 흠숭하는 노래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총지침」 86항은 “이 노래는 여러 목소리를 하나로 묶음으로써 영성체를 하는 이들의 영신적 일치를 드러내고, 마음의 기쁨을 표시하며, 영성체 행렬의 ‘공동체’ 특성을 더욱 밝혀준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 특성을 1969년에 발표된 「로마 미사 전례서 총지침」에서는 “영성체 행렬을 더욱 형제답게 만드는 것”(56항 가)으로 표현하고 있다.

 

 

2. 영성체 행렬 노래

 

1) 영성체 행렬 노래의 역사와 봉사적 기능

 

영성체 노래의 역사는 세기를 통하여 신자들의 영성체 관습이 어떻게 바뀌었는가 하는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초대교회 3세기 동안 신자들은 미사에서 정기적으로 성체를 받아 모셨다. 이렇게 신자들이 날마다 성체를 모시던 신심은 4세기부터 쇠퇴하여 성체를 받아 모시는 신자들의 수가 매우 빠른 속도로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성체 배령자의 수가 감소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아니즘에 대한 교회의 강한 대응 때문이었다. 이런 교회의 대응은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두려움의 신비’(Mysterium tremendum)를 과도하게 심어주어 성체 모시기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렇게 영성체하는 사람들이 없게 되자 영성체 노래는 사제의 영성체 후에 부르는 노래가 되고 말았다. 신자들이 앉아있는 동안 사제는 성직자 모자를 쓴 채 혼자서 그레고리오 성가 후렴을 노래하였다. 

 

그러나 트리엔트 공의회는 신자들의 잦은 영성체를 권장하였고, 비오 10세 교황은 신자들이 매일 영성체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신자들의 영성체 배령은 1940년경 일어난 전례 운동으로 더욱 잦아졌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따라서 지금과 같이 매일 미사에서 성체를 받아 모시는 현상이 바로 영성체 행렬과 영성체 행렬 노래의 복구를 위한 시발점이 되었다. 영성체 노래는 이제 더 이상 사제의 영성체 후에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신자들의 영성체 때에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현재의 영성체 노래는 본래의 기능대로 신자들이 행렬을 지어 영성체를 하는 동안에 부르는 영성체 행렬 동반 노래이다. 앞에 언급한 1969년 「총지침」 86항은 이러한 영성체 행렬의 복원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신자들이 영성체를 하러 제단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영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나아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영성체는 우리 자신과 그리스도의 일치, 더 나아가 성체를 영하는 우리들 서로간의 일치를 바라는 뜻에서 이루어진다.

 

2) 「총지침」이 추천하는 영성체 (행렬) 노래

 

전례 음악 봉사자들은 영성체 예식이 가진 본래의 의미를 파괴하는 지난날의 음악 선택의 관행, 곧 성체를 흠숭하는 찬미가들의 사용은 이제 버려야 한다. 아래에 「총지침」이 제시하는 영성체 행렬을 위한 노래를 살펴보겠다.

 

(1) 시편

 

영성체 노래의 가사와 관련하여 교회는 전통적으로 시편 사용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비록 다른 적절한 찬미가들이 주님과의 일치와 만남, 그리고 기쁨을 표현한다 하더라도, 교회는 시편을 가사로 사용할 것을 일차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이것은 신앙의 표현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어떤 훌륭한 언어보다 풍요로움을 나타낸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좋은 빵이 천상의 빵, 성찬의 빵을 대신할 수 없듯이 이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시(詩)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인 시편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미 아우구스티노(354-430년) 성인 시대부터 신자들이 영성체를 모시러 제단으로 나아갈 때 노래를 부르던 풍습이 있었다. 이때 신자들은 주로 시편을 노래하였는데, 로마식의 전통적인 영성체 노래로 가장 사랑을 받던 시편은 34편(희랍어 번역 33편) 6절과 9절이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 들여라.”는 가사 때문에 가장 애용되었다. 시편 145(144)편의 15절 역시 영성체 때 많이 사용되었음을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증언하고 있다. 이 두 개의 시편은 일 년 내내 사용되었다.

 

위에 언급한 시편 이외에도 교회 전통과 전례는 아래의 시편들을 사용하여 성체성사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시편 23(22)편 특별히 5절; 42(41)편 1절; 43(42)편 특별히 4절; 84(83)편 특별히 1-2절; 104(103)편 14-15절 그리고 27-28절; 116(115)편 12-13절; 128(127)편 3절; 136(135)편 25절; 147(147 B)편 12와 14절 등이다. 

 

원래는 시편 구절이 더 많이 이용되었지만, ‘하느님의 어린양’ 노래가 길어지고 영성체를 하는 신자가 감소하면서 시편의 구절들은 삭제되고 대송(antiphon)만이 지금의 영성체송으로 남게 되었다.

 

(2) 영성체송 후렴

 

「총지침」 87항은 영성체 노래를 위한 두 번째의 선택 사항으로 「로마 화답송집」(Graduale Romanum) 또는 「단순 화답송집」(Graduale Simplex)에 나오는 영성체송의 대송(antiphona ad communionem; 현행 「미사 전례서」 에 나오는 영성체송)을 추천하고 있다. 이 대송들은 시편과 함께 또는 시편 없이 노래할 수 있다.

 

(3) 적절한 노래

 

세 번째의 선택으로 「총지침」 87항은 “주교회의에서 인정된 적절한 노래들”의 사용을 제시하고 있다. 이 ‘적절한 노래들’이란 일반적으로 찬가들(canticles)이나 찬미가들(hymns)을 말한다. 한국어 성가집에 있는 대부분의 노래들이 찬미가들로서 이 ‘적절한 노래’에 속한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이 적절한 노래들은 한편의 시로 된 노래(우리가 보통 성가라고 부르는 찬미가를 말하며 후렴이 없다.)이거나 후렴(refrain)이나 대송(antiphon)을 가진 노래들이다.

 

찬미가는 기억하기 쉽고 부르기 쉬워 전례에 참여하는 신자들 모두가 가사와 선율을 암기할 때 더욱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신자들은 성체를 모시려고 행렬을 하는 동안에도 성가책을 들고 가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따라서 성체를 받아 모시러 갈 때 가장 적합한 노래는 대송이나 후렴을 가진 노래이다. 성가대가 시편이나 찬미가의 어려운 부분을 노래하고, 신자들은 쉽고 단순한 대송이나 후렴을 노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단순한 노래는 신자들의 일치를 강화해 주기에 더욱 바람직하다. 신자들이 노래를 부르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찬미가는 삼가는 것이 좋다.

 

* 이 글의 더 자세한 내용은 부산 가톨릭대학교 성음악연구소에서 발간한 「신앙과 음악」 7호(2004년 겨울 호)를 참조할 수 있다.

 

[사목, 2005년 8월호, 김종헌(대구대교구 성 김대건 본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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