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음악자료실

제목 음악편지: 주님, 제 입시울을 열어 주소서(Domine, labia mea aperies)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10-04 조회수3,768 추천수1

[아가다의 음악편지] 주님, 제 입시울을 열어 주소서 “Domine, labia mea aperies”



프랑스 수도원에서 보낸 성주간 이야기

이 지면을 통해 어떤 음악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지, 그 주제를 고르는 것은 매번 고민이 되는 일입니다. 이번에는 사순과 부활을 염두에 두고 갖고 있는 음반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모아놓았던 자료들, 수첩과 노트를 뒤적이고, 컴퓨터에 저장해둔 파일들도 이것저것 다시 열어보았죠. 수난곡이나 부활에 관련한 오라토리오 작품으로 주제를 잡아가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머리를 식히려고 클릭한 사진 폴더 안에서 ‘2006프랑스’라는 이름이 붙은 폴더를 찾았습니다. 한 장 한 장, 그 안의 사진들을 열어보았습니다. 그해 4월, 프랑스 남부의 한 수도원에서 지냈던 열흘 남짓한 시간들이 조금씩 되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때 경험했던 일들과 느낌을 글로 옮겨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2006년 4월, 운 좋게도 저에게 성주간과 부활의 모든 전례를 중세 수도사들이 했던 방식과 같이 라틴어 그레고리오 성가로 드릴 수 있는 프로그램에 참가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프랑스, 폴란드, 체코, 노르웨이, 미국, 콜롬비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60여 명의 참가자들과 함께 파리에서 테제베를 타고 남쪽으로 향했죠. 도착한 곳은 나르본(Narbonne)이라고 하는 작은 도시였는데요. 차를 타고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간 곳에 자리한 퐁프루아드 수도원(Fontfroide Abbey)이 바로 저희의 목적지였습니다. 시토회 수사들이 이곳에 터를 마련한 것이 11~12세기였는데, 현재는 수도자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대신 매년 성주간과 부활 기간만큼은 옛날 그대로의 전례가 이곳에서 지켜지고 있었습니다.

성지주일 새벽부터 부활대축일 낮 미사까지, 참가자들은 천 년 전의 수도자들과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해 뜨기 전부터 시작되는 독서기도(Lauds)를 시작으로 일과를 마치며 드리는 끝기도(Compline )까지, 하루 여덟 번의 기도, 즉 성무일도와 미사를 지켰죠. 모든 전례는 라틴어 그레고리오 성가와 시편 창으로 이루어졌는데요.

그중에서도 새벽 5시 반에 시작되는 첫 기도가 항상 가장 힘들었던 걸로 기억납니다. 4월이라고 해도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 안은 딱딱한 돌바닥 저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냉기로 가득했습니다. 이 첫 기도는 “Domine, labia mea apreries - 주님 제 입시울을 열어 주소서.”라는 말과 함께 시작됐지만, 진정으로 입술을 열기까지는 쉽지 않았습니다. 추위와 쏟아지는 잠도 문제였고, 언어도 문제였습니다. 1년 정도 공부한 어설픈 라틴어 실력으로는 주어진 음률에 맞춰 시편을 노래하는데, 남들과 다른 발음으로, 다른 음을 낼 때마다 저의 목소리는 작아졌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제 마음이 점점 더 편해졌습니다. 낯선 장소, 낯선 환경,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행복했습니다. 매일 오전에 있는 미사에서 강론은 프랑스어로 진행됐는데,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였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었습니다. 제게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음악으로 들렸기 때문이죠.

하루하루 지나면서 다른 참가자들과도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언어, 성별, 나이 등에서 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목적으로 그곳에 왔다는 이유만으로 서로의 마음을 열 수 있었습니다. 체코에서 왔다는 한 자매님은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국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도 말씀해주셨죠. 매끼 점심과 저녁 식사는 서로 돌아가며 준비했는데, 먼 동양에서 온 학생이라고 당번에서 빼주었던 일도 기억이 나네요. 부활 성야 미사를 마쳤을 때, 모두가 상기된 얼굴로 포옹과 악수를 나누며 기쁨을 나눈 것도 잊을 수 없습니다.

다시금 꺼내어 본 2006년의 추억이 이제 곧 다가올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제 자신의 모습을 점검하게 하네요. 마음을 다해 노래하고 기뻐할 수 있는 부활을 올해도 우리 모두가 맞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평신도, 제43호(2014년 봄), 양인용 아가다(KBS 1FM <새아침의 클래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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