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소리 지상의 음악가] 팔레스트리나, 공간의 음악 흔히 음악은 귀로 듣는 것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음악과 관련된 경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꽤 복합적이다. 음악이 어떤 이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림을 일으킬 때, 그의 마음속에는 그 울림이 일어난 때와 장소, 그 경험과 관련된 여러 가지 개인적 정황들이 함께 아로새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음악이 성당과 같은 종교적인 공간과 연관될 때 더욱 강렬한 체험으로 승화되는 듯싶다. 예컨대 미사 때 들은 음악에서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면, 성당이 아닌 다른곳에서 그 음악을 듣더라도 처음 자신의 마음을 움직였던 그 성당의 모습과 분위기, 미사 때의 감정을 함께 떠올릴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오늘날 음향과 관련한 기술의 발달은 우리가 음악을 경험하는 데 ‘장소’가 가지는 의미를 희미하게 한다. 세계 최대의 동영상 공유 사이트인 ‘유튜브’(YouTube)를 포함한 다양한 음악 감상 채널과 더불어 음악 기기의 발달은 음악을 경험하는 공간의 지형도를 바꿔 놓았다. 출퇴근길 사람들로 가득 찬 지하철 안이라 해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틀면 어느새 그 음악이 안내하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으로 음악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연주자들의 미세한 숨소리도 전달해 줄 만큼 녹음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이지만, 그럼에도 그 기술력이 우리에게 ‘생생한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 화면으로 공연 실황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 음악이 지난날 특정한 시공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듣는 이가 지난날에 경험했던 연주 실황의 현장감을 느끼기에는 녹화되고 녹음된 음악이 모든 면에서 미흡할 것이기 때문이다. 팔레스트리나의 다성 음악 필자에게 르네상스 시대의 다성 음악, 특히 이탈리아의 작곡가 ‘팔레스트리나’(Giovanni Pierluigi da Palestrina, 1525-1594년)의 무반주 합창곡은 그런 음악 가운데 하나이다. 팔레스트리나가 남긴 곡들은 그것이 본디 불렸던 공간을 벗어나면 그 곡이 지닌 영롱함이 대부분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팔레스트리나의 작품을 포함한 르네상스 시대에 작곡된 대다수 성가는 독특한 양식을 지닌다. 그중 하나가 모방 기법이다. 모방 기법을 사용하는 르네상스 시대의 성가에서는 성가대의 각 성부가 시차를 두고 하나씩 등장한다. 이러한 구성은 우리가 익히 아는 ‘돌림노래’의 짜임새와 비슷하다. 이런 짜임새 덕분에 성경 구절이나 기도문을 담은 이 성가들은 조금씩 그 가사에 담긴 내용을 들려준다. 예컨대 시편 42장을 팔레스트리나의 곡 ‘Sicut cervus’(우리말 제목: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로 감상하면, 이 곡의 시작 부분인 “sicut cervus”, 곧 “암사슴처럼”이라는 구절이 한 성부씩 긴 음가로 잔잔히 메아리치듯 들려올 것이다. 천장이 높고 잔향이 풍부한 유럽의 오래된 성당에서 이 음악을 듣는다고 상상해 보자. 나지막이 시작된 하나의 성부가 곧 두 개의 성부로, 그리고 성가대 전체가 합류하면서 굽이쳐 흐르며 마치 시편 구절이 천상의 소리가 되어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는 성경 말씀이 음악과 공간을 통해서 상징적으로 구현되는 현장이라 할 수 있다. 성당이라는 공간이 마치 이 음악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교회 건축과 교회 음악의 관계 이처럼 르네상스 시대의 교회 음악이 만들어 내는 특별한 음향들은 당시 교회 건축이라는 요소를 배제하고 생각하기 힘들다. 더불어 그 당시 교회 건축이 지닌 여러 시각적, 미술적 요소들은 교회 음악을 단지 인간이 만들어 내는 지상의 소리가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담은 천상의 소리처럼 들리게끔 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음악들은 신자들이 함께 노래하면서 참여하는 음악이 아니라, 교회에 고용된 전문 음악가들이 부르는 것이었다. 곧 회중과 일정한 거리를 둔 ‘듣는’ 음악이었다. 또한 이 음악들은 악기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인간의 목소리’로만 연주되었다. 오늘날의 ‘아카펠라’(a cappella)는 여기에서 유래했다. 곧 ‘교회풍으로’ 노래하는 ‘무반주 다성 음악’을 지칭하는 음악이다. 중세 · 르네상스 시대의 성가대석은 오늘날과 달리 제대와 신자석의 중간에 있거나, 제대 뒤편에 있었다. 곧 성가는 하느님을 향한 제사가 거행되는 제대와 가까운 곳에서 불리는 것이었다. 그 당시 신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의 목소리를 입어 아름다운 소리가 되었을 때, 노래가 울려 퍼지는 이 공간이 더 이상 세속의 공간이 아닌 천상의 아름다움을 지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거룩한 곳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이 음악들은 분명 그러한 종교적인 경험에 핵심을 두고 있었다. 동시대의 회화에서 인간의 모습을 한 천사들이 악기를 들고 노래하는 모습을 종종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 공간과 음악에 대한 담론 팔레스트리나는 르네상스 시대의 다성 음악 양식을 완성한 이라 불림에도, 「가톨릭 성가」에 그의 곡은 단 한 곡만 실려 있다. 196번 ‘오 착한 예수’가 그 곡이다. 더욱이 이 성가는 팔레스트리나 대부분 작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르네상스 시대 다성 음악의 전형을 보여주는 곡도 아니다. 신자의 전례 참여 비중이 높아지게 된 오늘날, 전문인들의 음악이었던 팔레스트리나의 곡들이 시대를 거치며 전례 음악으로 수용되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음악이 주는 경험이 지상의 것이 아니라, 천상의 것이라는 인식은 중세 이래로 오랫동안 교회 음악 안에 머물러온 담론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은 인간의 창조물인 음악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도구라고 생각했고, 또 이 음악을 종교적인 공간인 성당에서 듣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오늘날의 다양한 음향 기술은 성당뿐만 아니라 특정 공간의 잔향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로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오늘날의 음악 공간은 지난날과는 달리 종교적인 공간과는 분리된 별개의 것이 되었다. 그럼에도 르네상스 시대의 신자들이 대성전에서 팔레스트리나의 성가를 들으며 체험했을 공감각적 경험들을 완벽하게 구현해 내기란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음악당에서 듣는 팔레스트리나의 작품이 대성전에서 들었을 때만큼의 감흥을 주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정이은 안드레아 - 서울대학교에서 음악학을 가르치고 있다. 서울대학교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음악학을 공부하고, 홍콩대학교에서 음악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9년 8월호, 정이은 안드레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