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언]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 성가에 대한 논의 (1)
미사 중에 성가 부르지 않으니 빨리 끝나서 좋았나요? - 성가대원들이 합창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DB. 코로나19 팬데믹은 당연시 여겼던 우리 일상의 많은 것을 앗아갔다. 신앙생활도 예외가 아니었다. 공동체 미사 참여의 어려움은 곧 주님을 노래하는 전례음악 활동에도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2년 넘게 성가를 속 시원히 부르지 못한 것은 그 자체로 주님을 온전히 찬양하는 데 걸림돌이 됐다. 동시에 각 본당의 성가대 활동도 위축됐다. 교회에서 성가를 노래하고, 전례 음악에 임하는 것은 우리 마음을 성화시켜주고, 더욱 깊은 진리를 찾는 기도로 이끌어준다. 그러나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2년 동안 무미건조하다 싶을 정도로 사실상 ‘성가 없는 미사’를 봉헌해왔다. 아름다운 성음악을 함께 감상할 공연도 볼 수 없었다. 이에 팬데믹이 할퀴고 간 이후 다시금 가톨릭교회 음악의 가치와 의미를 되짚고, 공동체 전례의식 고취를 위하는 성가 본연의 가치를 일깨우고자 교회음악 발전을 위해 헌신해오고 있는 이상철(가톨릭 성음악아카데미 원장) 신부의 제언을 4회에 걸쳐 싣는다. 다시 주님을 제대로, 마음껏 찬양할 때다. 우리는 과연 예전으로 온전히 돌아갈 수 있을까? ‘코로나 냉담자’를 양산해 낸 팬데믹 사태를 겪으며 우리 교회는 미사 전례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급변의 시대를 겪고 있다. 성가를 부르지 못함으로써 전례의 풍요로움을 빼앗겨 삭막한 미사를 견뎌야 했다. 나아가 성가를 부르면 바이러스 전파에 일조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퍼지면서 성가에 대한 은근한 심리적 거부감이 생겨나기도 했다. 패배감과 냉소적 태도, 위기감과 허무함이 공존하는 가운데 질문하게 된다. 미사를 길어지게 만들고 은근히 돈도 드는데 성가를 꼭 불러야 되나? 교회 문헌에서 ‘성음악’이란 근본적으로 미사의 모든 경문을 노래로 봉헌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미사 중에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미사를 노래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미사를 이렇게 봉헌하는 성당은 하나도 없다. 신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며 사제들의 역량도 안 되기 때문이다. 파스카 성야 미사에서 불리는 ‘부활 찬송’이 신자들 사이에 희화화된 지는 오래되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성음악’이라는 고상한 말 대신 쉽게 ‘성가’라는 말을 쓰겠다. 「전례 헌장」 112항에서 성가는 본질적으로 “전례의 필수 불가결한 부분”(112항)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성가는 전례, 특히 미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는 것이라는 말이며, 따라서 “성가를 어떻게 해야 하지?”는 “미사를 그냥 이대로 두어도 될까?”와 관계된다. 또 같은 항에서 성가의 목적은 “신자들의 성화”(112항)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저 미사를 말로만 하면 삭막하니까 혹은 노래를 좋아하는 성가대원의 욕구를 해소시켜 주기 위해 또는 음악 애호가인 사목자를 만족시켜 주기 위해 성가나 특송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럴 거면 미사 때 백뮤직을 틀든지 노래방이나 콘서트에 가면 된다. 또 14항에서는 “모든 신자가 전례 거행에 의식적이고 능동적이고 완전한 참여”를 이루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모든 교우들이 한 마음으로 열심히 성가를 불러야 한다는 점도 포함되는 말이다. 이는 제창(諸唱, communal singing), 곧 공동체로서 다 함께 노래하는 것을 말한다. 미사는 주례사제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전례 헌장」28항은 “전례거행에서는 누구나 교역자든신자든 각자 자기 임무를 수행”한다고 하면서 미사의 주체는 사제를 포함한 하느님 백성 공동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 공동체성과 관련해 전례음악 전문가 하먼(K. Harmon)은 “제창은 전례에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사이의 경계를 없애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단일한 포용적 그룹에 스며들게 만들어 준다”고 하면서 “전례에서 우리가 노래함으로써 …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데 더욱 근본적인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 준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미사 중 성가 제창을 소홀히 여긴다는 것은 전례의 필수 불가결한 부분을 소홀히 여겨서 교우들을 공동체로 묶기는커녕 개별화, 파편화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미사 중에 성가 안 부르니 빨리 끝나서 좋네”라거나 “성가를 부르지 않아도 미사가 되네”라고 말하는 것은 전례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증거다. 오히려 팬데믹을 통과하면서 성가에 있어서 미사를 지루하게 만들거나 혹은 노래하라고 사제와 교우들을 귀찮게 만드는 요인들을 제거하는 기회로, 또 교우들의 목소리를 노래로 묶어 내며 그 마음이 일치된 참된 공동체의 미사가 봉헌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 미사 중에는 「가톨릭 성가집」의 노래 형태인 코랄과 같은 대중 찬미가와 CCM(생활성가)이 주로 불리는데, 그 가사들은 내용상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곧 ‘교의적 객관주의(Dogmatic Objectivism)’와 ‘심미적 주관주의(Aesthetical Subjectivism)’이다. 전자는 교리교육적이고 후자는 신앙고백적이며, 전자는 공동체적이고 후자는 개인적이다. 전자는 이성적이고 교계적이며 후자는 감성적이고 카리스마에 가깝다. 또한 전자는 지루할 수 있고 후자는 위험할 수 있다. 교회에는 둘 다 필요하지만 역사는 전자에서 후자 쪽으로 발전해 왔고, 소위 생활성가 대부분의 가사는 후자에 속한다. 그럼 이 시대 교우들의 성화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성가는 어떠해야 하고 어떻게 운용해야 할까? 어린이 성가는 21세기의 아이들에게 그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고 있을까? 어른 미사에서는 가톨릭 성가, 청소년 미사에서는 CCM(생활성가)을 부르면 충분할까? 그저 교우들의 선호도를 조사해서 뽑힌 것들을 부르게 하면 어떨까? 신학교에서는 그저 노래 연습만 조금 하면 되는 하찮은 것으로 성가를 취급하고 있는데 이렇게 교육받은 사제 개인의 판단에 맡겨 놓으면 충분할까? 교구에서는 그 책임이 방기되고 있는 건 아닐까? 신앙생활의 중심인 미사에서 교우들의 성화에 있어 핵심 수단의 하나인 성가와 관계된 중요하면서도 복잡한 사목적 사안에 대해 우리 교회는 이 간단치 않은 과제에 직면해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5월 1일, 이상철 신부(가톨릭 성음악아카데미 원장)] [제언]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 성가에 대한 논의 (2)
전례에도 멀티미디어 활용한 ‘보는 음악’ 적극 활용할 때 - ‘보는 음악’의 시대에 교우들이 더욱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미사에 집중하며 기도하도록 돕기 위해 전례와 성가에서도 멀티미디어 요소들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성가대원들이 성당에서 성가를 부르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DB. 필자는 여러 해 전 목포 지역 성가대를 대상으로 특강을 가진 바 있었다. 그때 멀리 외딴 섬에서 오신 성가대원 몇 분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거의 공소나 다름없는 작은 본당에서 환갑을 넘기신 세 분의 봉사자께서 지휘자와 반주자 없이 반주기기, 소위 가라오케를 틀고 선창 봉사를 하신다는 말씀을 들려주셨다. 이에 필자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열심히 봉사하시는 그분들에게서 깊은 감동을 받았었다. 성가는 고상한 오르간 소리와 레슨받은 목소리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분들이 몰라서 그리하시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반주기기는 이같이 부득이한 경우에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일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에서는 여러 악기에 대해 포괄적으로 “관할 지역 권위의 판단과 동의에 따라, 거룩한 용도에 적합하거나 적합해질 수 있고, 성전의 품위에 알맞고, 참으로 신자들의 교화에 도움이 된다면, 하느님 예배에 받아들일 수 있다”(120항)고 말한다. 따라서 ‘신자들의 성화’, 곧 교우들로 하여금 미사에 더욱 집중하면서 기도에 더 깊이 잠길 수 있도록 돕는다는 성음악의 최종 목표를 이룰 수만 있다면, 그것이 가라오케든 반주 음원(MR)이든 혹 유튜브나 여타 SNS든 활용하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특히 봉사자를 구하기 어려운 본당일수록 이런 멀티미디어는 더 적극적으로 폭넓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때때로 아마추어 반주 봉사자의 불편한 전자 오르간 소리보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오케스트라 반주가 교우들로 하여금 더 열심히 성가를 부르도록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대중음악계에서는 신곡이 발표될 때 뮤직비디오가 함께 발표되는 것이 당연시 된 지 오래되었다. 뮤직비디오의 시초로 인정받고 있는 비틀스의 1966년 신작 싱글 레코드인 ‘Paperback Writer/Rain’이 홍보용 프로모션 비디오로 방송국에서 방영된 이후 이제는 음반이 아니라 유튜브에서 더 많은 노래를 접하게 되었다. 오늘날 콘서트는 엄청난 오디오 시스템, 화려한 배경 화면과 조명 및 무대장치, 그리고 현란한 전자 기술과 군무가 함께 조화를 이루면서 말 그대로 관객들을 무아지경으로 몰아넣는다. 오늘날의 음악, 특히 무대 음악은 더 이상 ‘듣는 음악’만은 아니다. 이제 이는 여러 첨단 기술들이 집약되어 음악과 어우러지는 ‘보는 음악’이 되었다. 미사 중에 부르는 성가도 음악이다. 물론 미사는 교우들을 무아지경으로 몰아넣는 엔터테인먼트나 쇼가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교우들로 하여금 미사에서 더 열심히 성가로 찬양하며 기도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이런 기술의 일부분만이라도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 청년들이 성가를 통해 신앙 축제를 즐기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DB.
역사적으로 우리 교회는 그날 전례의 의미를 더 깊이 전달하기 위해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를 활용해 왔다. 성탄 시기에 화려하게 꾸미는 구유, 하나씩 촛불을 밝혀가는 대림환, 모든 전등을 끄고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는 부활 찬송, 여러 성상(聖像)의 활용, 촛불만 켜고 진행되는 떼제 기도 모임 등등.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전례에 있어서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들이다. 오늘날 몇몇 젊은 신부님들의 강론은 말만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PPT나 음원 등이 동원되는 입체적 강론이 이루어지면서 말로만 하는 강론은 점점 진부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전례와 성가에서도 이런 멀티미디어 요소들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아름다운 성가 연주를 유튜브로 들려주며 묵상하도록 하면 어떨까? 입당과 참회 때 어두웠던 조명이 대영광송에 이르러 최고로 환해지거나 독서와 복음 때는 롱핀 조명만으로 독서자를 비춰주어 집중케 하면 어떨까? 영성체할 때 때로는 그날 전례 주제에 맞춰 성화와 성가가 조합된 동영상을 활용하면 어떨까? 이런 동영상들은 유튜브에 넘칠 정도로 많을 뿐만 아니라 웬만한 젊은 신부님들은 잘 만들기도 한다. ‘보는 음악’의 시대에 교우들이 더욱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미사에 집중하며 기도하도록 돕기 위해 여러 기기들과 멀티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전례의 시대로 넘어가는 탈바꿈이 필요하지 않을까? 패러다임의 큰 변화 속에 팬데믹을 거치며 우리 교회는 위기의 시대를 지나고 있으며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그저 인원수가 아닌 질적 능력을 키워나갈 필요가 있다. 유학파 성악전공자라면 무조건 우대받는 분위기는 이제 바뀌어야 한다. 변화의 시대에 필요한 성가 지휘자는 사목의 협조자라는 마인드와 더불어 전례와 성가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전례 및 교회의 전망에 대해 고민하는 이어야 한다. 발성과 지휘능력뿐 아니라 편곡과 컴퓨터 사보 능력, 멀티미디어 기기 활용 능력, 그레고리오성가에서 CCM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을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 변화의 시대에 반주자에게는 오르간뿐만 아니라 재즈 피아노 반주 능력과 신디사이저 활용 능력이 요구된다. 성가대원들은 성가대 영성을 바탕으로 전통에서 현대에 이르는 다양한 가창 능력을 지니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보는 음악’의 시대, 멀티미디어의 시대에 우리에게는 더욱 넓은 스펙트럼 속에 다양한 능력을 지닌 협조자들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기존의 전통 성음악이라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시대적 부르심에 대한 자각이 요구된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5월 8일, 이상철 신부(가톨릭 성음악아카데미 원장)] [제언]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 성가에 대한 논의 (3)
성가대, 노래 연습이 아니라 ‘소명 의식’과 ‘영성 교육’ 필요하다 -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필리핀 신자들이 교황 주례 미사에서 성가를 합창하고 있다. [CNS 자료 사진] 팬데믹 사태를 겪으면서 다시 한 번 묻는다. 성가대는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 현실적으로 이야기해 보자. 사목 현장에서 다른 모든 것은 사라질지라도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것은 바로 미사 전례이다. “전례는교회의 활동이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거기에서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원천”(「전례헌장」 10항)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전례 거행과 교우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훌륭한 사제의 강론에서 교우들은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새 시간을 살아갈 힘과 위안을 얻는다. 우리가 미사 중에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소리는 주례자인 사제의 목소리이다. 어떤 어르신께서 도통 무엇을 강론하시는지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하자 어떤 본당 신부는 “영으로 들으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어처구니가 없다. 기도문을 읽고 복음을 선포하는 사제의 좋은 목소리, 말투나 어투, 발음을 비롯해 좋은 음향 시스템을 바탕으로 훌륭한 강론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줄 아는 능력이 사제에게 필요하다. 그래서 효과적인 강론을 위해 멀티미디어까지 활용하는 젊은 신부님들의 노력은 교회의 미래를 더욱 밝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팬데믹을 통과하며 큰 변화의 시기를 겪고 있는 우리 교회에 이는 더욱 절박한 것이 되었다. 그런데 모든 사제가 대중 연설 훈련을 받거나 말씀의 은사를 받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교우들이 미사 중에 답답해 하거나 무미건조함을 느낄 때 바로 거기서 그들이 주님을 느끼며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보조적이며 효과적인 도구는 무엇일까? 성가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성가대의 영성(靈性, spirituality)이 비롯된다. 성가대는 그저 특송을 위한 합창단이 아니며, 전례에 있어서 ‘사목자의 협조자’인 것이다. 그래서 성 바오로 6세 교황께서도 자의교서 「일부 직무」에서 품계 제도를 개정하면서도 성가 담당자를 굳이 직무자(Ministerium)에서 배제시키지 않은 것이다. 단순 봉사자(Volunteer)와 전례 직무자(Minister)는 분명 다르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어느 교구는 성가대 지휘자 및 반주자와 관계된 공문서를 본당에 발송하면서 이들을 아주 간단히 ‘자원 봉사자’로 분류해 버린 바 있다. 노동법과 관계된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사례비의 유무와 관계없이 이는 전례에 대한 지식과 의식 없이 그저 행정 편의적으로만 이들의 역할을 규정해 버린 아주 나쁜 예로 남게 될 것이다. 경신성사성은 「성음악 지침」에서 “성음악에 한 부분을 담당한 이들은 무엇보다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어야 한다”(97항)고 말한다. 비록 수가 적더라도 아무나 성가대를 시켜서는 안 된다. 성가대에게 필요한 것은 ‘노래 연습’이 아니라, 전례에서 사목의 협조자로 부름 받았다는 ‘소명 의식’과 그에 합당한 ‘영성 교육’이다. 성가대 안에서 서로 갈라져 반목하고 갈등을 조장하며 사목자에게 골치 아픈 단체로 낙인찍히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이유도 이 영성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가대에 대한 사목자의 인식도 변화되어야 한다. 복사단이나 제대회와 달리 왜 이따금씩 성가대가 해체되는가? 성가대는 전례에서 사목자의 지도 아래 교우들을 기도하게 하는 데 필수적인 협조자요 동반자라는 인식과 존중감이 사목자들에게 필요하다. - 교회 음악의 진수로 알려진 르네상스 시대 교회 전례용 무반주 다성곡(PolyPhony)을 연주하는 남성 합창단 ‘폴리포니 앙상블(Polyphony Ensemble)’의 공연 모습. 따라서 당연히 성가대는 그에 합당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성체 분배 봉사자는 많은 교육을 받는다. 그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며 성체를 건네주기만 하면 되는, 그리 큰 수고가 드는 역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선발에 심사숙고하며 결코 짧지 않은 교육 과정을 거쳐서 심지어 ‘권한’까지 부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데 미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담당하는 성가대원에게는 어떠한 자격 여부도 요구하지 않는다. 노래만 잘하면 된다고 여기는 성가대원이 적지 않다. 전례 의식이 부족한 지휘자도 적지 않다. 이는 성가대에 대한 사제의 의식, 교회의 제도적 지원, 그리고 무엇보다 성음악에 대한 신학교의 빈곤한 교육과 관계된다. 혹자는 이로 인해 성가대원의 수가 대폭 줄어들 것을 염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독창이나 소수의 인원만으로 성가가 이루어지는 미사는 전혀 생소하지 않은 것이 되었다. 소수의 정예요원으로 성가대를 탈바꿈시켜 보는 것은 어떨까? 노래를 부르며 무대에 서고 싶은 이들을 위해서는 노래 동아리나 노래교실을 만들면 될 것이다. 성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현대의 복음 선교」에서 “복음과 문화의 괴리는 틀림없이 우리 시대의 비극”(20항)이라고 밝히셨다. 지난 2007년 미래학의 대부로 불리는 미래학자 짐 데이토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류는 농업사회와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화 사회 다음엔 ‘꿈의 사회’라는 해일이 밀려온다”고 단언한 바 있는데, 이는 5년이 지난 현재 소위 ‘한류’라는 것으로도 진행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사목 현장의 예술단체라 할 수 있는 성가대는 ‘성전 중심주의’와 ‘전례 중심주의’라는 고루한 틀을 벗어날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교서 「주님 저희와 함께 머무소서」 28항에서 “서로 사랑하고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일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 제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하시며 “이것은 성찬례 거행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전례와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성가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와 관련하여 성가대는 음악이라는 수단과 매개체를 통해 지역사회 문화의 복음화에 자신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질 필요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이는 자선 음악회나 노래 봉사 혹은 휴식처럼 여겨질 생활성가 노래교실 등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훈령 「교회의 복음화 사업에 봉사하는 본당 공동체의 사목적 회심」에서 “본당 사목구는 지난날과 같이 모임과 사교의 으뜸가는 곳이 아니기에 동행과 친교의 새로운 형태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14항)고 지적한 바 있다. 성가대는 이와 같은 여러 실천적 봉사를 통해 스스로 신앙의 기쁨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복음과 문화의 풍요롭고 창의적인 만남은 참된 발전으로 이어지고, 한편으로 하느님 말씀께서 인간의 역사 안에 강생하시어 이 역사를 쇄신”(4항)하시는 데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5월 15일, 이상철 신부(가톨릭 성음악아카데미 원장)] [제언]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 성가에 대한 논의 (4·끝)
교구 성음악위, 교구장의 성가 정책 보좌해야… 본당 투자도 관건 - 성음악이 쇄신되고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재정에 대한 인식 변화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합당한 자격을 갖춘 성음악 전문가에게 소정의 사례를 지급하는 것은 그저 소비적 인건비가 아니라, 아름다운 전례와 교우들의 신앙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투자이다. [CNS 자료 사진] 예술에도 행정과 정책이라는 것이 있다. 성가를 부르는 교구와 본당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오랜 기간 우리 교회는 이를 일선 본당 사목자에게만 떠맡겨 놓았다. 그래서 본당마다 성가에 대한 사목 지침은 일관성이 없고 사목자가 바뀔 때마다 혼란을 겪는다. 그래서 때로는 애정을 가지고 활동하던 음악 전문가가 상처를 입고 그만두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신학교에서 이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 없는 본당 사목자는 전문적 지원 없이 홀로 그 책임과 부담을 떠안고 있으며 교구의 관심, 정책과 지원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성가는 단순히 노래가 아니다. 이는 전례학과 관계되어 그 실천적 고민들이 2000년을 이어오면서 서양음악의 뿌리를 이루고, 방대한 가르침을 쌓아온 대단히 전문적인 분야이다. 이는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형태의 음악에 대한 비평적 판단, 가사의 바탕을 이루는 성서학, 신학 및 교리와 문학에 대한 지식, 교우들이 생활하는 세상의 음악적 경향과 그 바탕을 이루는 심성에 대한 연구, 음악 단체의 조직 및 운영과 재정 등 여러 분야와 관계되며 전례에서 교우들의 신앙적 양태를 결정짓는 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는 전례의 생동감 및 교회 공동체의 활성화와 연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일선 본당 사목자 개인이 결정할 수만은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전례위원회와 협력해 “교구의 사목 전례 활동과 더불어 성음악을 발전시키기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맡는”(「성음악 훈령」 68항) 교구 성음악위원회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전례헌장」은 이러한 ‘공동체적 노력’을 증진시킬 것을 요청하며 이를 ‘전례적 사목활동’(43항)이라 칭하고 있다. 따라서 교구별로 사목자와 더불어 교회에 올바른 애정을 가진 여러 평신도 전문가들을 불편부당함 없이 두루 참여시킨 위원회를 통해 교구장의 성가 정책을 보좌할 필요가 있다. 이 위원회는 그저 음악회를 열거나 성가책을 출판하는 곳이 아니다. 나아가 성음악이 쇄신되고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재정에 대한 인식 변화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팬데믹이 한창이던 작년 주님 성탄 대축일에 어느 본당에서 성가대뿐만 아니라, 오르간 반주까지 중단시키고 미사를 봉헌하면서 주례 사제가 교우들에게 “미사가 참 조용하니 좋지 않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오르간 반주조차 없는 성탄 미사에서 교우들이 과연 성탄의 기쁨을 제대로 느꼈을지 궁금해진다. 아마도 돈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한 기업이 어디에 가장 집중하고 있는지를 보려면 어느 분야에 가장 많은 돈을 쓰는지 살펴보면 된다. 본당이든 교구든 인건비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돈을 쓰는 분야는 어디일까?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본당 사목구는 “성찬의 공동체”이며 “성찬은 본당 형성의 살아 있는 원천”(「평신도 그리스도인」 26항)이라고 하셨다. 한마디로 본당의 존재는 미사 전례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당 재정의 일차적인 투자 고려 대상은 당연히 미사여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합당한 자격을 갖춘 성음악 전문가에게 소정의 사례를 지급하는 것은 그저 소비적 인건비가 아니라, 아름다운 전례와 교우들의 신앙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투자이다. 「성음악 지침」에서도 “오르가니스트나 성가대원과 그 지휘자, 악기 연주자… 그리스도교의 정의와 애덕 실천은 이들에게 법 조항과 지역에서 인정된 규정에 따라 적합한 임금을 주도록 요구한다”(101항)고 했다. 실력 있는 가톨릭 음악가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개신교로 개종하는 일이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가? 노동법을 세심히 고려하면서 음악으로 먹고사는 전문가에게 자원봉사만을 일방적으로 요구해서는 안 된다. 성 비오 10세 교황께서는 후기 낭만주의 음악의 범람과 민족주의의 태동, 전자음악 및 재즈 음악의 출현, 제3세계 음악의 유입 등으로 인해 전통 성음악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는 위기감 속에 1910년에 교황청 성음악학교를 설립하셨다. 이에 발맞춰 교회의 많은 문헌들이 “성음악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전례헌장」 115항)을 권했다. 즉 성음악 교육은 결코 다른 교육기관에로 유보할 수 없는 분야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미사 중에 기껏해야 성가 몇 곡 부르는 것뿐인데 굳이 돈 들여서 전문가를 쓸 필요가 있을까?” 오늘날 성음악의 위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사제, 수도자, 평신도를 막론하고 인터넷의 발달에 기초한 소위 ‘덕후’가 성가 분야를 좌지우지하기도 한다. 「전문가와 강적들」이라는 책을 쓴 톰 니콜스는 이를 ‘전문성의 종말’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성음악 고등교육기관의 불필요성으로 이어지며, 이 ‘전문성의 상실’은 성가를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이나 편의주의에 빠지게 하거나 혹은 다른 음악에 종속시키거나 아니면 스스로를 고립시켜 버린다. 이는 성음악적 가치의 상대화를 초래하고, 신학교 교육의 결핍은 이를 가속화 시킨다. 성음악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목자나 성가대 지휘자는 개신교나 세속 음악의 사용에 거리낌이 없다. 여러 교황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조차 왜 성음악 고등교육기관을 강조했는지 새겨보아야 한다. 끝으로 방송 미사에 대해 덧붙이고 싶다. 팬데믹 사태를 겪으며 성가에 대한 미디어의 역할은 더욱 증대되었고 특히 방송 미사를 통해 가톨릭평화방송의 역할은 참으로 지대해졌다. 다시 말해 방송 미사는 마치 미사 전례의 표준처럼 인식될 가능성이 커졌으며, 거기에서 부르는 성가도 또한 모범이나 표준처럼 인식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말이다. 이는 또한 어떤 성가를 통해 이 시대에 걸맞은 신자들의 성화를 어떻게 도모할 것인지에 대한 방송국의 책임 또한 그만큼 막중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방송국은 이런 점에서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가톨릭평화방송은 전례와 더불어 성음악에 대한 전문가 그룹이나 위원회의 지원이나 자문을 요청하는 책임 있는 자세를 갖추거나 이와 같은 진지한 논의를 시작하는 촉매제의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5월 22일, 이상철 신부(가톨릭 성음악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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