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 ·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 (9) 옛 음악의 기둥 - 여덟 선법, 여덟 느낌
여덟 개 선법마다 분위기 다르고 깊은 의미 숨겨져 있으니 - 클뤼니수도원 옛 곡물 창고 기둥에 상징화돼 부조로 조각된 제1~4선법. (왼쪽부터)제1선법에는 현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젊은이가, 제2선법에는 심벌즈를 치면서 춤추는 여인이, 제3선법에는 수염을 기른 남자가 현악기 리라를 연주하는 모습이, 제4선법에는 한 남자가 고개를 기울이고 한쪽 어깨에 세 개의 종이 달린 멍에를 걸머지고 있는 모습이 조각돼 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는 미국에서 인사드립니다. 한국에 들어와 정식으로 스페인 비자를 준비하던 중 갑작스럽게 쿠바 선교 파견이 확정되는 바람에 서둘러 출국했습니다. 지금은 예레미야스 총재 아빠스 권고에 따라 쿠바에 들어가기에 앞서 미국 뉴저지에 있는 뉴튼수도원을 방문해 1주간 지내고 있습니다. 출국하기 이틀 전 왜관수도원에 들러 정식으로 선교 파견 예식을 하고 형제들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제 손을 맞잡고 인사를 나누던 형제들 표정을 보니 얼마나 저를 안쓰럽게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물론 고생이야 하겠지만 유럽을 쏘다니고 이제는 미국에, 쿠바까지 간다니, 우리 형제들이 노동으로 땀 흘리고 고생한 대가, 또 선교 후원을 해 주시는 모든 분의 선의 덕에 보통은 하기 어려운 경험을 하게 되는 터라 오히려 고마운 마음 가득합니다. 특히 기둥같이 수도원을 지탱하고 보이지 않는 곳곳에서 자기 자리를 지켜주는 형제들에게 늘 고맙습니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그 덕분에 제 자리를 비워도 공동체가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건물이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 주는 역할을 기둥이 하듯, 음악에서도 어떤 곡이 그 꼴을 유지하게 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있습니다. 바로 장조와 단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조성인데요. 현대에 새로 만들어지는 노래들은 조성에서 벗어나기도 하지만, 이전에는 어떤 곡이든지 곡의 마지막에 꼭 마침음 혹은 으뜸음이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이 음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게 바로 조성입니다. 예를 들어 다장조는 도, 혹은 도가 포함된 C 화음으로 끝나지요. 하지만 오늘은 조성이 있기 훨씬 전에 음악의 기둥 역할을 하던 선법(Modus)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아직 바흐가 있던 시절에 약간의 흔적이나마 있던 선법 말입니다. 지금은 장조와 단조, 이렇게 크게 두 개의 조성이 있는데, 선법에는 그레고리오 성가가 만들어지던 시대부터 이미 8개의 선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6세기에 글라레아누스(Glareanus)라는 스위스 인문주의자이자 음악학자가 이 8개의 선법에 정격(autheticus)과 변격(plagalis)의 이오니안(Ionicus)과 에올리안(Aeolius) 네 개를 덧붙여 총 12개의 선법으로 확장했고, 그 가운데 장조에 해당하는 정격의 이오니안 선법과 단조에 해당하는 정격의 에올리안 선법 즉 장단조의 조성 음악이 17세기 초부터 주류를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전통적인 8개 선법 이전에 원시 선법들도 있고, 시편 낭송음(Tenor)이 중간에 변하는 제9선법(글라레아누스가 9선법이라고 덧붙인 정격의 에올리안 선법 이전부터 제9선법이라고 불렸습니다) 혹은 순례자 선법(Tonus peregrinus)도 있습니다만, 일반적으로 선법을 말할 때는 앞서 말씀드린 8개의 선법을 말합니다. 이 선법은 요즈음 인쇄되는 그레고리오 성가 악보를 보면 악보 첫 번째 글자 위에 적혀있는 로마 숫자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조는 밝은 분위기, 단조는 슬프고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한다면, 여덟 개나 되는 선법은 도대체 어떤 분위기를 자아낼까요. - 클뤼니수도원 터 모형도. 중세 때 유명했던 클뤼니수도원은 현재 옛터와 건물 일부만 남아있지만 옛 곡물 창고 기둥들은 당시 음악의 기둥 역할을 하던 선법을 알려준다. 중세 때 아주 유명했던 베네딕도회수도원이 있습니다. 바로 클뤼니수도원인데, 지금은 무너지고 옛터와 건물 일부만 남았지만, 수도원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면 나타나는 옛 곡물창고 안에 몇 개의 기둥들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중 두 개의 기둥이 여덟 선법을 설명해 주고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이 그레고리오 성가를 부르면서 당시 음악의 기둥을 이루던 여덟 개의 교회선법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개의 기둥에는 각각의 선법을 부조로 상징화해서 조각했고, 그 부조를 둘러싸고 6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라틴어 시(Hexameter)가 각 선법을 표현합니다. 제1선법에는 현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젊은이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제1선법인 만큼 첫째가는 계명,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관련되며, 시편 말씀처럼 현악기로 하느님을 찬미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제2선법에는 한 여인이 시편 제150편 말씀처럼 심벌즈를 치면서 춤추고 있습니다. 제2선법은 이웃 사랑을 담고 있으며, 라틴어 시를 보면 제1선법에 종속된 변격선법이자 동시에 클뤼니 수도승들이 이웃 사랑을 하느님 사랑과 끈끈하게 연결된 계명으로 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3선법은 수염을 기른 남자가 ‘도’부터 ‘라’까지의 여섯 줄짜리 현악기인 리라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이 연주자의 손은 ‘미’를 가리키고 있는데, 제3선법의 마침음이자 리라의 세 번째 현입니다. 이 숫자 3은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조를 둘러싸고 있는 라틴어 시가 “제3선법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을 표현한다”고 하는 것처럼, 제3선법은 슬픈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언제나 부활의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한편 제4선법은 한 남자가 고개를 기울이고 한쪽 어깨에는 세 개의 종이 달린 멍에를 걸머지고 있습니다. 네 번째 종은 아래쪽에 있는데, 이 제4선법이 ‘미’로 끝나는 제3선법에 속한 선법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라틴어 시는 제4선법이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것을 노래로 보여준다고 합니다. 죽은 라자로를 두고 모두가 나흘간 슬퍼했다는 내용과도 연관됩니다. 그래서 이 제4선법은 보통 단조보다도 더 슬픈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제5선법부터 8선법까지를 묘사하고 있는 두 번째 기둥은 아쉽게도 부조들이 거의 깨지고 부서져서 잘 알아볼 수 없습니다. 라틴어 시구로 선법들의 분위기를 추측할 뿐입니다. 제5선법의 라틴어 시는 “높아진 이가 얼마나 낮은 이인가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이 말은 마침음 ‘파’부터 ‘시’로 네 개의 온음이 올라가는, 소위 ‘음악의 악마’(diabolus musica)와 관련이 있습니다. 옛 법칙에 따르면 악보에 따로 표시되어있지 않아도 ‘도’로 향할 때는 ‘시’, ‘라’로 내려올 때는 ‘시b’으로 바꾸어 불렀기 때문입니다. 제6선법에는 “만일 네가 신심의 감정을 갖고 싶다면, 여섯 번째를 보아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선법은 기쁨, 믿음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제7선법에는 “은총으로 하느님의 숨을 슬며시 내보낸다”고 적혀 있습니다. 성령의 일곱 은사와 관련이 있고, 그래서 찬미, 찬양에 대표적인 선법입니다. 제8선법에는 “모든 성인들이 복되다는 것을 가르친다”고 적혀 있습니다. 진복팔단과 관련되어 있으며, 성령의 일곱 은사가 바로 마지막에 지복이라는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 선법들의 분위기는 또 학자들마다 다르게 표현하기도 합니다만, 무너지고 남은 클뤼니수도원의 기둥이 표현하는 것처럼, 옛 노래의 기둥을 이루고 있는 여덟 선법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분위기를 마음에 품고서 노래를 불렀으면 합니다. [가톨릭신문, 2022년 5월 8일,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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