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 ·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 (25 · 끝) 함께 서로를 품는 성탄 시기
예수님을 우리 삶에 품고 지고 모시고 가려고 살아갑니다 - 독일 밤베르크대성당에 전시된 성탄 구유. “이제는 저도 나이 좀 먹었어요.”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 가운데 저보다 어른들이 더 많으시지만, 이렇게 얘기해도 듣는 분들이 불쾌해하지 않으시고 농담으로 너그러이 받아들여 주실 만 한 정도가 된 것 같긴 합니다. 물론 점차 고령화되어가는 사회에서, 예전의 40대 중반과 비교를 할 수는 없겠지요. 저도 그래서 아직은 한참 ‘젊은 것들’ 가운데 하나로, 선배들 앞에서 그저 투정과 재롱을 부리려는 마음으로 저런 말을 하긴 합니다. 그래도 정말 어느새 시간이 이만큼이나 지났습니다. 시간이 지나는 만큼 마음에 품어가는 것들이 많아지게 되고, 이렇게 마음에 품어가는 것들의 무게를 느끼게 되면서, 이제는 나이가 조금이나마 들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나이에 맞게 철도 좀 들었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마음에 품어가는 것들 가운데, 특히 기도가 있습니다. 기도를 청하는 분들 가운데에는 가끔 ‘애인 만나게 해 주세요’ 같이 이걸 기도지향에 넣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게 만드는 부탁을 하는 분도 있지만, 너무나 무겁고 심각해서 정말 오랫동안 마음에 품게 되는 기도 부탁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또 제가 개인적으로 잘 아는 어떤 분들에 대해서는, 그분들이 요청도 하기 전에 먼저 기도가 필요하겠다 싶어 떠오르게 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을 제 마음이 먼저 품고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어릴 땐 딱히 마음에 무엇이나 누군가를 크고 깊게 품고 살아가지를 않았습니다. 제 앞가림하기에 급급했지요. 그런데 점점 마음에 품어가는 사람 관계도 넓어지고, 거기에다 깊어지기까지 하면서 가끔 무게를 감당하기 힘든 일도 생기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 가족들을 마음에 더 깊고 넓게 품어가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수도 생활을 하면서 지금의 제 나이쯤 되면 부모님의 병환, 형제들의 사업 실패 등 적어도 한두 차례 집안에 여러 가지 근심 걱정들이 찾아옵니다. 저 자신도 그랬고, 다른 수도 형제들도 그랬고, 가끔은 수도 생활 자체가 휘청거릴 정도로 그 무게를 감당하기 힘든 경우들을 보곤 하는데, 그래도 다행히 다들 잘 견뎌냅니다. 자기 문제보다는 특별히 가족을, 그리고 타인을 깊이 품어가면서 겪어 보내야 하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에 부르는 그레고리오 성가 영성체송 악보.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에 부르는 그레고리오 성가 영성체송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이 지면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보통 성가정 축일은 주님 성탄 대축일인 12월 25일과 성탄 팔일 축제 마지막을 장식하는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사이에 오는 주일에 거행합니다. 하지만 올해에는 주님 성탄 대축일이 주일이 되는 바람에, 팔 일 째 되는 내년 1월 1일도 주일이 되고, 그 사이에는 주일이 오지 않게 됩니다. 이 경우에는 성가정 축일을 12월 30일에 거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날 복음(마태 2,13~15.19~23)에서는 주님의 천사가 두 차례나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한 번은 ‘이집트로’ 그다음에는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고 합니다. 그리 길지 않은 오늘 복음에서 두 번이나 언급하는 이 표현이 어쩌면 이날 복음의 핵심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3년에 한 번 낭독하게 되는 이 복음의 짝을 이루는 것이, 이날 부르게 될 영성체송입니다. 보통은 어느 해에 불러도 괜찮을 노래들을 부르지만, 특별히 가해 성가정 축일에는 이날 복음 본문을 그레고리오 성가 영성체송 노래 가사로 삼았기 때문에 3년에 단 한 번만 이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Tolle puerum et matrem eius, et vade in terram Israel: defuncti sunt enim, qui quaerebant animam pueri”(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그레고리오 성가를 공부하다 보면, 고대 수사본에 나온 기호 해석이나 점차 발전하게 되는 멜로디나 박자를 비교하고 복원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레고리오 성가의 토양이 되는 성경 말씀과 그레고리오 성가가 만들어지던 당시에 큰 영향을 주었던 교부의 성경 해석도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재미있는 건, 이 노래를 만든 그 누군가가 이날 복음 텍스트를 살짝 바꾸었다는 것인데, 성경 번역을 라틴어로 하면서 수많은 번역본이 나왔지만, 그 어떤 라틴어 성경도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라는 표현에서 ‘데리고’를 ‘tolle’로 번역한 것이 없다는 점이 확 비교됩니다. 라틴어 성경은 여기에서 ‘accipe’를 씁니다. 굳이 번역을 하자면, 요셉이 아기와 아기의 어머니를 받아들여서, 떠맡아서 가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미 800년경에 나온 그레고리오 성가 텍스트 모음집들(Graduale von Mont-Blandin, Compiègne, Corbie, Senlis 등)은 굳이 이 표현을 ‘tolle’로 바꿉니다. 이 ‘tolle’라는 단어는 ‘데리고 가다’, ‘가지고 가다’라는 뜻도 있지만, 첫 번째 뜻은 ‘들어 올리다’, ‘집어 들다’라는 뜻입니다. 왜 이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이 노래를 부르는 때가 언제인지를 생각하면 답은 금방 나옵니다. 아기를 데리고 가는 사람은 요셉만이 아닙니다. 이 말은 바로 우리에게 하는 말이며, 이 노래를 부르는 때 성체를 받아 모시러 가면서 직접 육신이 되어 태어나신 예수님을 들어 올리듯 받아 우리 안에 모셔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800년 즈음에 나온 그레고리오 성가 텍스트 모음집 하나(Graduale von Rheinau)는 ‘네가 데리고 가라’는 ‘tolle’가 아니라 ‘너희가 데리고 가라’는 복수형 ‘tollite’를 사용합니다. 또 재미있는 것으로는, 중간의 ‘이스라엘’(Israel)과 맨 마지막 단어 ‘아기’(pueri)가 7선 법과 8선 법을 왔다 갔다 하던 노래를 뜬금없이 똑같은 방식으로 끝냅니다. 음악적으로 상당히 억지스럽긴 하지만 의도된 억지 종결입니다. 바로 본래의 7선 법으로 다시 돌아가 갑작스럽지만 편안한 끝맺음처럼,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 이스라엘은 바로 아기로 태어나시는 예수님이고, 또 곧 성체로 받아 모실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 무얼까 고민해 봅니다. 믿는 목적이 무얼까 고민해 봅니다. 그저 마음의 안식을 얻는 것만은 아닐 겁니다. 예수님을 우리 삶에 품고, 지고, 모시고 가려고 우리는 살아갑니다. 나 자신 하나 품고 가기도 벅찬 게 사실이긴 하지만, 점점 성숙해지면서 가족, 나아가 이웃 형제자매들의 무게와 깊이도 함께 품고 갑니다. 성가정 축일, 성탄의 신비가 가르쳐 주는 것이 이렇게 서로를 품으라는 게 아닐까 합니다. 이 지면을 마치면서 응원해주시고 기도해 주셨던 모든 분 함께 마음에 품어봅니다. 함께 서로를 품을 수 있는 성탄, 연말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가톨릭신문, 2022년 12월 25일,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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