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청년성가집'출판의 문제점 (2-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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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헌 | 작성일1999-07-16 | 조회수2,104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전례적 판단을 마치면서,
본인이 이 글을 통해 어줍잖은 전례음악에 대한 지식을 늘어놓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무런 근거 없이 문제점만을 지적하는 것은 더 많은 반발을 야기 시킨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문제점 (2-1)과 (2-2)에서 이런 근거를 미리 제시하였던 것이다. 아래에 나오는 문제점의 지적은 바로 위의 두 글에서 나온 것이다. '청년 성가집' 출판의 문제점을 말하면서 유학 와서 배운 것을 자랑하기 위한 호기로 삼는다고 생각한다면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 마련된 근거들은 가능하면 생략하기로 하겠다.
또 한 가지, 본인에게는 지금이 굉장히 중요한 시기이다. 솔직히 말한다면 이런 일로 인해 한 시간도 뺏기고 싶지 않고, 뺏길 수도 없는 절박한 상황이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청년성가집 출판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아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어디 자랑할 데가 없어 여기다가 글을 올리겠나? 이것도 한국의 교회음악과 젊은이들을 생각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여러 사람에게서 이런 저런 수모(?)까지 받아가면서 말이다. 중대한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수고했다". "잘 했다," "멋지다"라고 너나 할 것 없이 칭찬만 받고 싶은 마음이야 누군들 없겠는가?
소위 말하는 데모판은 여론을 듣기 위해 출판한 것이라 하는데 그냥 잘못된 것은 사랑(?)으로 덮어두고 찍소리 말고 가만있으란 말인가? 이것이 여론을 듣겠다는 사람들의 태도인가? 진정 여론을 듣겠다면 본인의 문제점 지적에 사실 여부만을 이야기하면 되지 빈정되고 딴 사람은 가만있는데 너만 잘 났느냐 하는 식의 글들은 말만 여론을 듣겠다는 기만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 본다. 본인만 침묵하면 모든 게 조용히 흘러가는 줄 알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아무 잡음 없이 원하는 성가집을 출판하게 되는가? 본인도 이 성가집을 사용하게(?) 될 지금과 미래의 많은 젊은이들과 한국 교회음악의 앞날을 생각하며 한 달간을 고심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다음 글, '사목적 판단'을 마지막으로 이 글을 마치겠지만 때로는 쓴 소리가, 그들이 진정으로 교회음악을 위해 앞으로도 활동할 생각이라면, 옆에서 그냥 치켜세우는 것 보다 먼 훗날 고마워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착각도 해 본다. 그리고 아직도 이 글은 계속 중이라는 것을 명심해 주면 좋겠다.
B, 전례적 판단에서 살펴 본 청년 성가집의 문제점 청년 성가집에 수록된 창작곡의 음악적인 수준이 많이 떨어진다고 하였다. 어쩌면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음악적으로 맞는가 틀리는가 하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런 음악적인 것인 것 보다 바로 이 전례적 판단에서 볼 수 있다. 이 분석에서는 이 성가집이 분류하는 창미사곡과 찬양가 및 축가는 그 대상에 넣지 않았다. 창미사곡은 전례문을 이용한 가사이기에, 성가의 내용상으로는 완전 무결하다. 형식의 문제를 다시 다루지 않겠다. 문제점(1)에서 다룬 음악적인 분석은 그대로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또 부록에 속한 찬양가 및 축가 역시 다루지 않았다. 다만 일반 성가라고 분류된 72곡의 성가 중 외국곡을 제외한 창작곡 40여 곡만을 대상으로 하였음을 밝혀 둔다. 문제점은 많지만 큰 것 두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1) '성가'라고 할 수 없는 노래가 너무 많다 일반 성가로 분류해 놓은 창작곡 40여 곡의 성가 중 20개 정도는 본인이 아무리 후하게(?) 생각해 보아도 미사 중 어느 부분에도 사용할 수 없는 가사를 가진 음악인 것 같았다. 72곡 중 외국성가 40여 곡을 빼고서 20여 곡이면 여간 많은 숫자가 아니다. 주된 이유는 가사 때문이다. 바로 성가의 내용이다.
문제점 (II)를 시작하기 전에 전례 때에 사용하는 기도와 성가의 내용은 찬미와 감사여야 한다고 적었었다. '기도와 성가'라는 단어를 가만히 들여다보자. 거의 같은 말이 아닌가? 詩에 선율을 붙이면 음악이 되듯이 기도에 선율을 붙인 것이 성가가 아닐까? 우리 중의 아무도 미사 때에 드리는 기도의 대상이 하느님이며 내용이 찬미와 감사, 그리고 기원하는 내용이어야 한다는데 반대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아니 없어야 하는데 실지로는 그런 것 같지않아 걱정이다. 그런데 왜 성가는 그런 내용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할까?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친구들간의 우정을 노래하고도 적당히 한번씩 하느님 소리만 나오면 성가인가?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성가란 도대체 무엇인가? 기도와 같은 가사에 선율을 붙인 것이 성가 아닌가? 성가는 그저 노래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성가는 기도가 아니며 문화 생활 중의 하나인 노래부르기로 생각하기에 아무런 내용이나 가진 노래를 성가라는 이름으로 살짝 덮어 전례 때에 마음대로 부르려 하는 것인가?. 책을 직접 보지 않은 분들은 성가라는 이름에 깜빡 속아서 그래도 성가인데 왜 시비냐? 할 수 있다. 여러분은 앞에서 (2-1) 소개 드린 성가(?) 가사를 기억할 것이다. 다시 한번 감상해 보자.
제목: 이유 생각해 봐 그것은 시작이야 우리가 아파하던 그것이야. 나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또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세상 우리를 갈라놓은 세상 속에서 싸워야 해 찾아 줘 내 마음을 사랑 우리가 알고있는 그것이야.
부족한 시적 감각 탓인지 몰라도 이런 가사를 가진 노래를 미사 중 어느 부분에 사용할 수 있을지 도무지 판단을 할 수가 없다. 이런 가사가 20여 곡이다. 미사 중 어디에 소위 성가라고 하는 이 노래를 사용하면 좋겠는가? 예물 봉헌 때? 영성체 행렬 때? 억지로 사용한다면 혹시 입당이나 퇴장 때 사용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런 노래들의 가사가 문제점 (2-2)에서 보듯이 입당이나 퇴장 성가의 기능인 축일이나 전례 시기의 성질을 나타내 주고 있으며 주님께 대한 찬미의 내용을 담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거의 20여 곡이 성가의 기능과는 전혀 상관없는 가사를 가진 노래들이다. 본인은 이런 곡들을 '성가'라고 부르기를 단연코 거부한다.
아래에 소개하는 성가(?)의 가사들도 일반성가 부문에 수록되어 있는 것들이다.
제목: 함께 가요 함께 가요 오 사랑하는 그대여 그대와 함께라면 이 세상이 행복해요 (중략) 그대여 삶이 힘드나요. 혼자라는 생각인가요 당신 곁에 내가 있잖아요. 그대여 내가 힘이 들 때 그대에게 말할께요 그렇게 서로 의지할 수 있도록 기도해요
제목: 우리 안에 사랑이 그 동안 우리 서로 너무나 떨어져 때로는 원망 속에 살았지만 이제는 우리함께 서로의 아픔달래며 위로하는 사랑을 해요. (중략) 우리 이제 노래해요. 서로에게 들려주는 사랑 노래를 우리 이제 노래해요. 우리 안에 사랑이 넘치도록.
천천히 읽으면 기도가 되는가? 이런 가사의 노래를 미사 어느 예식에 사용했으면 좋겠는가? 어떤 사람은 본인이 이런 가사만 마음먹고 골랐다고 할 수도 있겠고, 이런 노래는 청년 모임을 위해 만든 곡인데 전례음악으로 착각하고 다룬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이 성가집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세 개의 성가(?) 가사의 경우, 아무리 살펴봐도 가톨릭적인 냄새는 하나도 없다. 가사에 나오는 사랑도 하느님의 사랑이 아닌 이성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기도라는 단어가 한번 나오는데, 남녀가 서로 의지하며 잘 살수 있도록 기도한다는 이 단어 하나 때문에 성가라고 할 수 있는가?. 기도와 사랑이라는 말은 신자 아닌 일반인 사이에도 충분히 통용되는 단어이다. 어쩌면 신자들보다도 더 사용할지도 모른다. "너의 건강을 위해 기도한다." 하는 말 등이다. 또 교회의 기도문보다 오히려 대중가요의 가사에서 사랑이란 단어를 더 찾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이런 단어 하나 때문에 성가라는 이름을 붙일 수가 있는가? 성가는 성가다워야 하고 그 성가의 내용은 하느님께 대한 찬미이다. 아마도 詩를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라면 본인이 찾아 본 20개 이상의 가사를 문제삼을 것으로 확신한다.
다른 어떤 예술보다도 음악은 예배의 중심이 되는 말씀을 강조하고 이 말씀에 봉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음악이 노래부르는 사람과 듣는 사람, 그리고 합창일 경우 노래부르는 사람들 서로를 결합시키는 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교회가 전례 때에 사용하는 음악은 노래부르는 신자들을 노래의 원천이며 내용이신 그리스도와 결합시킨다고 하여 음악을 단순히 음악으로서가 아니라 전례의 한 상징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기에 공의회는 성가의 가사는 "언제나 가톨릭 교리에 부합하여야 하며, 주로 성서와 전례에서 취해야 한다"고 권고하는 것이다. (전례헌장 121항) 따라서 전례에는 성서적인 언어가 사용되어야 마땅한데 그 이유는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어떤 언어보다도 전례 안에서 음악의 힘을 강조하고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를 이끌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사의 준비는 언어 예술, 고전적인 전례언어의 훈련을 받은 사람, 번역 기술을 가진 사람 그리고 음악가의 협동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위의 전례헌장 121항에서 "언제나 가톨릭 교리에 부합하여야 하며"라는 구절에도 유의하기 바란다 (한국어판에는 이 말이 없다). 비록 성서에서 혹은 전례에서 취하지 않은 가사라도 성가의 가사로 사용할 수 있지만 그 내용은 가톨릭 교리에 언제나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가사가 성가집에 어떻게 있을 수가 있을까가? 할 수 있겠지만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말씀드린다. 이런 서투른 시는 하느님께 향하려는 신자들의 마음을 거슬려 방해만 할뿐이다.
2) 성가의 절대적 부족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가집에 수록된 곡의 전체 수 (창미사곡, 찬양가 및 축가 제외) 72곡이 너무 적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점 (2-2)에서 말한바 있는 미사의 구조를 전혀 고려치 않거나 성가의 기능을 고려하지 않고 편집한 탓인지 몰라도 입, 퇴장을 위한 노래말고는 다른 미사의 예식들에서 부를 성가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이다. 만족스러운 분류는 아니지만 최소한 가톨릭 성가집의 분류를 참조만 했더라도 아마 '성가집'이란 이름으로 출판하겠다는 생각을 안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단 가톨릭 성가집의 분류를 따라 연중, 대림, 성탄, 사순, 부활, 성령, 성체, 성인, 성모, 순교자, 등에 대비해 곡의 수를 살펴보려고 한다.
사순 시기 노래: 한 곡도 없음; 부활 시기 노래: 한 곡도 없음; 대림 시기 노래: 한 곡도 없음; 성탄 시기 노래: 1곡 (?); 성가라 하기에는? 봉헌 노래: 한 곡도 없음; 성체 노래: 한 곡도 없음; 성모 노래: 1곡; 순교자 노래: 한 곡도 없음; 성인 노래: 1곡이다.
그 외의 곡은 모두 연중시기에 입당 혹은 퇴장 노래로나 쓸 수 있을는지?. 전례시기 (사순시기, 부활시기, 대림시기, 성탄시기)나 축일에 따른 성가도 전혀 없고, 각종 성월 (성요셉성월, 성모성월, 예수성심성월 등) 때 부를 노래도 하나도 없다. 무슨 이런 성가집이 있는가? 이 성가집을 사용하여 미사를 드릴 수 있는가? 있는 성가(?)라고는 거의 대부분이 입당 혹은 퇴장을 위한 노래들뿐이다. 미사가 입당 예식만 있는 것이 아닌데 미사의 전체 구조를 생각하지 않고 곡을 만들고 편집을 하는 등 전례적 판단에서 잘못되어도 한참 잘 못되었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전체 72곡에서 성가 같지 않는 노래를 20여 곡 빼고 나면 뭐가 남는가? 그냥 '청년성가집'아닌 딴 제목으로 출판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좋은 곡이 있다면 본당에서 골라 사용하게 하면 되지 않을까? 그러나 음악의 분류는 전례용인지 모임용인지 정확히 해야 하리라고 본다.
NB. 마지막 글 '사목적 판단'과 결론을 다음에 올리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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