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라우다떼 복음묵상(한국순교자대축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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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봉섭 | 작성일1999-09-20 | 조회수1,430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잠원동 라우다떼성가단 복음묵상시간에 드렸던 말씀입니다.
99. 9. 19.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제1독서 지혜 3,1-9(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번제물로 받아들이셨다.) 제2독서 로마 8,31ㄴ-39(죽음도 생명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복 음 루가 9,23-26(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준비 및 진행 : 이봉섭 바오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여러분,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그러니까 한국의 수많은 순교자들을 기리는 날이지요. 그분들을 생각하며 우리는 오늘 미사와 성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런 순교 정신을 함께 되새겨 봅시다. 오늘 복음은 루가복음 9장 23절에서 2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복음읽기>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거나 망해 버린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영광스럽게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말씀이 상당히 낯익을 겁니다. 바로 2주일 전에 마태오복음을 통해서 비슷한 말씀을 들었거든요. 그 날 복음묵상시간에, 십자가를 외면하고 구원받겠다는 것은 먹고 싶은 대로 다 먹으면서 살을 빼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얘기도 나왔던 것이 기억나실 겁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심약해진 감정에서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결단과 분명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 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거나 망해 버린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라는 말씀에서 목숨이란 결국 영원한 생명을 가리키는 말씀일 것입니다. 참 생명에 이르는 길에서 어떤 것을 버릴 필요가 있다면 기꺼이 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배가 풍랑 속에서 자기 길을 가기 위해서는 물건들을 바다에 버리고 가벼워져야 하는 것과 비슷할 것입니다. 순교자는 이렇게 주님을 향한 길을 가기 위해 생명을 바친 사람입니다. 주를 믿지 않겠다는 한 마디 말로써 자기 생명을 건질 수 있는 것을 알면서도, 수만의 우리 선조들은 그냥 죽어 갔습니다. 그러면서 목숨으로써 신앙을 고백하고 증거한 것입니다. 오늘 제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런 순교자들의 신앙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그 때 그분들의 상황과 그 마음들을 오늘의 우리와 연관지어서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분들이 다져 놓은 신앙의 발판 위에서 오늘날 우리는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순교란 우리와는 거리가 먼 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지금에 와서도, 참 신앙인다운 삶을 사는 것에는 역시 많은 유혹과 박해가 따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 오히려 멸시받고 바보 취급을 당하지 않습니까?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바르게 살지 못하도록 은연중에 계속 유혹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교회 안에서까지 너무나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기가 성가대니까 성가대를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분명히 노래로써 주님을 찬미하기 위해 모인 단체인데, 우리 15년 역사 안에서 올바른 찬미를 드리려는 노력이 얼마나 이루어져 왔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올바른 전례가 어떤 것인지 찾기보다는 우리 자신들한테 쉽고 재미있는 노래를 하려 하지 않았는지, 그러니까 하느님 중심이 아니라 우리 중심의 전례를 하겠다는 생각이 더 많지 않았는지, 미사나 연습보다 애프터에 더 관심을 두지 않았는지, 그리고 이런 생각이 전체의 분위기가 되어 버리지 않았는지... 이런 것이 굳이 우리 성가대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세상의 분위기가 교회 안에도 이미 깊게 침투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분명히 신앙 단체 속인데도 전례 정신이 어떻고 영성이 어떻고 하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 귀찮은 사람으로 취급받는다는 느낌도 많이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현대 세계를 ’피흘림이 없는 순교의 시대’라고도 합니다. 세상의 분위기에 동조하지 않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 오히려 바보 취급을 받고 심지어는 자기 사회에서 귀찮은 존재로 따돌림을 받거나 내몰리는 경우도 많으니, 결국 이 세상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겠다는 것 자체가 곧 십자가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비록 피를 흘려 가며 순교하지는 않아도, 그래서 옛날의 순교자들과 모양이 다르고 정도의 차이가 있어도, 지금 세상 속에서 신앙인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이렇게 십자가를 지는 순교자적 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적인 순교의 의미는 신앙의 올바름을 고지식한 것으로 치부하거나 당연한 진리를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매도하도록 하는 세상의 유혹을 끊어 버리는 것, 그 결단이라고도 말합니다.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저도 신앙인다운 길에 대한 생각을 게을리 하다가 유혹에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다시금 결심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분명히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길, 나아가서 순교에까지 이르는 길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이지만, 우리와 우리 공동체가 참된 생명으로 가는 길인 것입니다. 오늘 제 1독서인 지혜서 말씀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들을 수 있습니다. "미련한 자들의 눈에는 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재앙으로 생각될 것이며 우리 곁을 떠나는 것이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으로 생각되겠지만, 의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 눈에 의인들이 벌을 받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은 불멸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이 받는 고통은 후에 받을 큰 축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도 그 큰 축복을 희망하며, 세상의 유혹을 끊고 자기를 버릴 수 있도록 다시금 결심하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을 다시 읽으면서 스스로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순교자들이 왜 그렇게 생명을 바쳐야 했는지, 그리고 우리 자신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복음읽기 및 묵상>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도 세상의 유혹과 고난에 굴하지 않고 굳건히 주님 향한 길로 나아가도록 인도해 주소서. 그리고 저희 묵상과 결심들이 저희가 바치는 전례와 생활 안에 녹아들게 해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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