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동네 성가단에서 전통 성음악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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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봉섭 | 작성일1999-12-01 | 조회수931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원주교구 북평성당의 신승용 베드로 형제님께서, 라우다떼가 지금의 전통 성음악을 봉헌하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이 과정에 대한 설명을 해 달라고 하셔서 이 글을 씁니다. 임박한 석사논문 발표 준비에 여유가 없어서 답이 늦었습니다. (아마도 전례음악강습회 하는 12월 10일 낮이 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동해에 계신 분께서 여기까지 저희 발표회를 보러 와 주셨다는 것이 저는 놀랍기만 합니다.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또 그 열정이 정말 감동적이고 존경스럽습니다.
저희 발표회 전, 그 프로그램을 보고 어떤 분이 ’동네 성가단에서 이런 곡들이 가능하냐?’고 하셨답니다. 물론 쉽지 않은 곡들이라 하신 말씀이겠지만, 그만큼 일반적인 성가단(’동네 성가단’ 아닌 데가 몇이나 있습니까?)에서 이런 음악은 잘 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찾을 수 있겠습니다. 제가 글을 쓰는 것은 라우다떼가 특별하다고 하기 위함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사정에 맞게 훌륭한 성음악을 바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라우다떼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 마음의 문제였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결국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단 재미 없어 했습니다. 사실 그레고리오 성가나 다성음악은 지금의 일반 사람들이 볼 때 세상에 깔려 있는 다른 음악들에 비해서 단번에 재미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마치 고급 음식이 fast food(junk food)에 비해서 그렇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생소했습니다. 이런 것은 무슨 장송곡이나 참회예절용 곡쯤 되는 줄 알더군요. 일부러 찾아 듣지 않았다면, 세상에서는 물론 성당에서마저 이런 음악을 대해 본 경험이 적었습니다. 들어 본 경험이라면 참회예절 같은 데서 배경음악으로 들은 것 정도 있을까요? 그레고리오 성가 알렐루야를 불러 보았더라도, 이런 음악이 기쁨과 영광을 정말 아름답게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부분 사람들은 성가가 전례에서 가지는 의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성가대원은 전례에서의 중요한 봉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영성적 바탕이 척박한 경우가 많다 보니, 어떻게 성가를 바치는 것이 합당한 전례 봉사인가 하는 문제에는 아예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례에서든 일반 모임에서든 당장 들어서 재미있는 음악을 하려고 합니다. 라우다떼에서도 물론이었습니다.
기술적인 부분에서도 역시 생소함의 문제가 컸습니다. 모든 노래가 그래야 하겠지만 특히 전통 성음악은 가사와 음악의 일치가 중요하여 그 악센트를 잘 살려 주어야 하는데, 그런 연습들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가사와 음악의 일치라는 개념이 서지 않은 것은 물론, 그레고리오 성가의 아르시스와 떼시스(파도가 밀려 오는 것과 나가는 것에 비유하더군요) 등의 느낌을 노래에 싣는 것을 너무나 어려워했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우리가 하는 말과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악센트(또는 익뚜스)를 살리라면 무조건 퍽 하고 치고, 흘러 나와야 할 것도 모든 음표를 하나하나 눌러 내고... 그리고 큰 소리를 지를 수는 있었어도(듣기 좋든 아니든 간에), 인간적인 것을 절제하고 정결하게 소리내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테너의 경우 가성(팔세토)으로 해야 할 부분까지 무조건 진성을 내다가 음이 떨어지고 찌그러지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또한 간단한 악보조차도 잘 못 읽는 단원이 많다 보니 파트별로 독립적인 진행을 하는 다성음악의 경우 연습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다만 악보를 잘 읽는 사람들 몇몇이 군데군데에서 끌어 주기 때문에, 이 점은 다른 성가단들보다 낫다는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결국 모든 어려움들은 영성의 문제와 생소함의 문제로 요약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라우다떼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단히 일반적인 문제일 것입니다. 또한 대부분 전통 성음악(그레고리오 성가나 다성음악)만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합당한 전례음악’을 바치는 데 관한 문제일 것입니다.
라우다떼에서 이 문제들을 해결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많은 문제와 부족함을 안은 채 노력하는 중일 뿐입니다. 생소함의 문제에서는 결국 계속 접하는 것밖에 대책이 없을 것입니다. Fast food처럼 당장 맛을 느끼기는 어렵더라도, 계속해서 그런 음악을 들어 보고 불러 봄으로써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맛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도 상당 기간 동안 계속 맛들여 가면서 많은 단원들이 이 분위기에 익어 가고 좋아하게 된 듯합니다. 일부는 아직 그렇지 않지만, 또 한편으로 벌써 푹 빠진 사람들도 보입니다. 영성의 문제에서 역시 시간을 가지고 계속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주일마다 복음묵상도 하고, 단장과 지휘자 등 앞에서 이끄는 사람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뜻을 이야기해 주는 등의 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특히 지휘자는 가장 많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며 직접 곡을 다루는 사람이기 때문에, ’앵무새의 노래’가 아니라 영혼의 울림을 이끌어 내는 데 누구보다 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전례음악을 전공했고 신념을 가진 지휘자를 둔 라우다떼는 이 점에서 큰 행운을 누리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지휘자가 전례 의미에 대해 개념이 없을 경우는 정말 힘들어지므로, 교회의 각별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어쨌든 상당 시간 노력하다 보니 분위기가 많이 발전했다는 생각은 듭니다. 계속 주님을 향한 복된 길을 가고 싶습니다. 아직도 주님의 채워 주심에 놀라다가도 이내 마음이 식곤 하지만 말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노력을 시작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많지 않은 사람들이 다수를 앞에서 이끄는 모습입니다. 아직 많은 어려움이 있고, 실망하며 기운 빠질 때도 많고, 또 노력하는 사람들 자신들도 한참 부족합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이 신념과 열성을 가지고 노력하는 가운데, 점차 여러 사람이 안에 숨어 있던 정성된 마음들을 발견하며 동참해 갑니다. 또한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해 주시고 도구로 쓰심을 체험하며 기뻐합니다...
성음악을 하는 모든 분들께서 주님 안에서 힘을 얻으시기를 빕니다.
이봉섭 바오로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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