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옮김] 새 전례시편 승인에 부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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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가톨릭성가마스터 | 작성일2009-03-14 | 조회수2,531 | 추천수1 | 반대(0) |
<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2008년 추계 정기총회에서 승인한 "전례시편"이 올해 예수 부활 대축일 이후로 사용됩니다. 이에 따라 지난 3년간 개편 성경의 시편에 근거하여 전례에 사용되던 입당송, 화답송, 복음환호송, 영성체송 등이 다시 조금씩 바뀌게 되기에, 새 전례시편과 관련하여 개편 취지와 내용을 요약한 글을 올립니다.
저자 심규재 실베스테르 신부님은 작은형제회 소속으로서, 교황청 성 안셀모 대학 전례연구소에서 전례학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 주교회의 전례위원회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이 글은 경향잡지 2008년 12월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새 전례시편 승인에 부쳐
심규재 신부 (작은형제회) 지난 (2008년) 10월 주교회의가 승인한 전례시편은 새로운 번역이 아니라 새 성경에 들어있는 시편과 찬가를 전례에 쓰기에 더 어울리도록 다듬은 본문이다. 원래 성경과 전례는 나뉠 수 없는 관계다. 곧 전례가 성경을 수집하여 보존하고 전승하였다. 그리스도 교회는 처음부터 구약성경 전체를, 특히 시편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빛에 비추어 읽었다 (루카 24,44 참조). 그래서 교회 초기에 이미 시편은 “그리스도의 기도이며 그리스도께 바치는 기도”라는 원칙이 굳어졌다. 실제로 교회는 그리스어 성경(70인역)에서 히브리어 ‘거룩한 네 글자(YHWH)’를 ‘퀴리오스(주님)’ 라고 옮긴 구절을 그리스도에 관련된 것으로 읽었다. 하느님을 가리키는 이 낱말은 아버지의 위엄과 함께 부활하신 분의 영광도 드러내기 때문이다. 최근 사도좌가 “전례에서 하느님의 이름, ‘야훼(YHWH)’는 적을 수도 발음할 수도 없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곧 지극히 거룩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뿐더러 무엇보다 그렇게 부를 때 주 예수 그리스도가 빠지기 때문이다. 교회가 그리스어 시편과 스스로 번역한 시편을 존중한 이유는 이렇게 자신의 믿음과 전례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전례에서 사용하는 성경은 반드시 원문, 곧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에서 번역해야 한다 (훈령 ‘올바른 전례’ 24항). 그러나 로마 전례의 해석 전통을 유지하고 성경 원문을 보는 데 도움을 받으려면 새 대중라틴말성경을 반드시 참고해야 한다. 특히 시편의 경우는 더욱더 그러하다. 시편의 이러한 특성을 바탕으로 새 우리말 쓰임에 자연스러움과 시적 운율을 더 살려 새 전례시편을 다듬었다.
전례 전통과 우리말 쓰임, 시적 운율에 따라 가다듬음
1. 히브리 시편과 그리스어 또는 라틴어 시편이 다른 경우 전례 전통에 따라 자주 대중라틴말성경을 따라 다듬었다. 예를 들어 시편 110편은 오랜 전통에 따라 메시아, 임금과 사제를 주제로 읽으며, 모든 주일과 주님의 대축일과 축일 저녁기도에 노래하고, 성체 성혈, 서품, 기원(사제) 미사에서 화답송으로 노래하기 때문에 전례 전통에 따라 ‘전쟁 지도자’보다는 사제-임금 표상을 살려 다듬었다. “네 권능의 날에/ 주권이 너와 함께하리라./ 거룩한 빛, 새벽 품에서/ 나는 너를 낳았노라” (110,3). 우리말 번역에서 뜻이 모호한 경우 라틴말성경과 현대역을 참조하여 본문의 뜻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다듬었다. 예를 들어 전례에서 자주 사용하는 시편 51편의 경우, 9절을 새 성경에서는 “우슬초로 제 죄를 없애주소서.”로 의역했으나 전례시편에서는 “우슬초로 정화수를 뿌리소서.”로 옮겼다. 사실 우슬초로 뿌리는 것은 본디 ‘피’지만 전례 맥락에서는 ‘정화수’가 더 어울린다. 이 구절은 전례력의 여러 시기 화답송 외에도 어른 세례예식 미사 화답송, 성수예식에서 노래한다. 그리고 영성체송으로 많이 쓰이는 시편 34,9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초대송 시편인 95,7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도 거행 현실을 반영한 결과이다.
2. 우리말 쓰임에 맞추어 더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다듬었다. “탐욕스런 적에게 저를 넘기지 마소서” (27,12). 비슷한 표현이라도 그 뜻이 더 드러나게 하였다. “주님이 시온을 귀양에서 풀어주실 때/ 우리는 마치 꿈꾸는 듯하였네.” (126,1).
3. 원문 충실성을 따르느라 소홀하였던 시의 운율도 전반적으로 다듬었다. 우선 대명사 (당신, 그분)는 시의 운율을 생각하여 뜻이 드러나는 데 문제가 없으면 생략하였다. 그리고 하느님 존칭어에 붙는 주격 조사 ‘께서’는 ‘이(가)’로 바꾸었다. 시에서는 ‘께서’가 너무 많아 글이 무겁게 느껴졌고, ‘-시-’가 갖는 주체높임 기능으로 존대의 뜻이 충분히 드러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종결어미 ‘-다’는 약한 감탄의 맛을 내는 ‘-네’로 바꾸었다.
전례시편에서 바뀐 몇 가지 표현
1. 하느님을 지칭하는 데 다른 전례문에서 쓰지 못하던 2인칭대명사 ‘당신’을 썼다. 새 성경에 “하느님께 대한 애정과 존경을 바탕으로 ‘당신’이라는 인칭대명사를 쓴다.”고 밝히고 있다. “애정과 존경”이라는 단순한 표현 뒤에는 언어와 정서만이 아니라 성경, 전례, 영성, 신학, 역사, 사목 차원의 성찰이 담겨있다. 전례위원회는 시편을 포함한 노랫말의 경우 예외를 허용한다는 지침을 주어 전례시편에서는 ‘당신’을 썼다. 그리고 히브리말이나 서양말에서 흔히 쓰는 인칭대명사는 우리말 습관을 생각하여 많이 생략하였다. 하느님 호칭과 관련된 표현에서 ‘저희’, ‘저의’를 많이 생략하였다. 특히 ‘주 저희 하느님’과 ‘주 저의 하느님’은 모두 “주 하느님”으로 바꾸었다 (86,12는 예외로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나 “저의 하느님”, “하느님, 저의 하느님”은 많이 남아있다. 대명사는 단순한 언어 습관이 아니라 하느님과 관계를 드러내는 신학 표현으로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예를 들어 당신의 백성, 당신의 가련한 이들, 당신의 적, 당신의 원수와 같은 경우 ‘당신’은 단순히 개인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 또는 사회 전체 차원을 여는 기능을 한다.
2. 일상에서 잘 안 쓰는 예스러운 표현은 되도록 피하되, 다른 전례문들과 조화를 생각하여 새 성경이 피한 ‘-나이다’를 살렸다. 장중한 선언을 표시하는 ‘-노라’는 상당히 남겼고 ‘-로다’는 조금 남겼으며 ‘-도다’는 피했다. 다만 간접 호격 ‘-(시)여’는 예외로 사용했다. 새 성경 시편에서 이미 ‘주여’는 ‘주님’으로 바꾸었으나 하느님을 바꾸어 부르는 표현에 남아있다. 구원이시여; 용사시여; 힘이시여;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시여; 이스라엘의 목자시여;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여; 세상의 심판자시여.
3. ‘할렐루야’는 그리스어 성경, 동방과 서방 교회의 매우 오래된 전통에 따라 ‘알렐루야’로 바꾸었다. 그리고 새 성경 구약에서 ‘기름부음받은이’라고 옮긴 히브리말 ‘마쉬아’는 ‘메시아’로 옮겼다. 전례시편에서는 후기 유다교의 메시아 사상이나 그리스도론 전망을 피할 이유가 없다. 새 성경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옮겼고, 지금 시간전례서(성무일도서) 머리말에도 ‘메시아’를 쓰고 있는 것도 참조하였다 (올바른 전례, 23항 참조). ‘궁전’은 전례 전통을 생각하여 ‘성전’으로 바꾸었다. 구약성경에서도 이 말은 궁전 외에도 여러 곳에서 천상 궁전, 성전,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곳의 뜻으로 사용한다.
전례시편은 언제 어디서 사용하게 되는가
주교회의는 전례시편을 승인하면서 ‘시간전례서’를 제외하고 모든 전례서에서 쓸 것을 결정하였다. ‘시간전례서를 제외하고’라는 말은 지금 쓰고 있는 시간전례서 시편도 (비록 히브리말에서 직접 옮기지 않아 사도좌의 지침에 어긋나지만) 전례시편으로 바꿀 때까지는 유효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성경 본문과 기도문의 일관성과 안정성 때문에 전례에 쓰는 성경은 하나만 승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올바른 전례, 36항). 특히 하느님 백성의 기본 기도서인 시편은 더욱더 그렇다 (올바른 전례, 36항 참조). 전례시편은 시간전례서 외에 이제부터 미사전례에 사용된다. 모든 미사에서 화답송은 시편과 찬가로 이루어진다. 입당송, 영성체송은 대부분 시편에서 가져온다. 따름노래나 화답송이나 찬가로 시편을 노래한다. 전례 성가집에 들어가는 노래들도 시편을 사용하거나 영감을 받아 만든다. 그 밖에 상장례 예식서나 다른 예식서에서도 시편을 많이 사용한다. 공동체의 말씀의 전례나 공동기도 또는 신심행사들에서도 시편은 반드시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개인으로 기도할 때도 시편들은 훌륭한 기도서가 될 것이다.
이 전례시편집이 완벽할 수는 없다. 전례 전망이나 문학과 노래 관점에서도 아쉬운 점이 있다. 어떤 용어는 더 깊은 성찰이 필요하기도 하다. 예를 들어 ‘가르침’으로 옮긴 ‘토라(율법, 법)’는 하느님의 ‘이름’처럼 그분의 ‘현존’과 관련을 갖는다 (시편 119,18 참조). 하느님과 관계 안에서 표현되는 우리말 인칭대명사 문제도 넘어야 할 산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주교회의가 승인한 전례시편집은 이제 한국 교회의 공식 전례, 공동체와 개인의 기도 생활에 맡겨졌다. 이 시편집을 사용하는 이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이 “신앙의 힘, 영혼의 양식, 영성 생활의 순수하고 영구적인 원천” (계시헌장, 21항) 으로 변하리라 믿는다. 또한 모든 이들이 참된 예배자가 되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며” (요한 4,23) 언제나 새로운 노래를 부르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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