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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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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성녀
복자
복녀
천사
이름 :
지명 :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8.2)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성인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 (Peter Julian Eymard)
성인 기본정보
축일
8월 2일
신분
신부, 설립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811-1868년
성 페트루스 율리아누스 예마르(Petrus Julianus Eymard, 또는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는 1811년 2월 4일 프랑스 동남부 그르노블(Grenoble) 교구의 라뮈르(La Mure)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줄리앙 예마르는 올리브유를 파는 상인이었고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네 명의 딸을 두었다. 아내와 사별한 후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네 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 가운데 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가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그의 어머니와 이복 누이들은 모두 열심한 신앙인이었다. 그가 살던 마을 성당에서는 매일 미사 후에 성체 현시와 강복을 했는데, 그의 어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 전례에 참여하였다. 그래서 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도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현시된 성체나 감실 앞에 앉아서 성체조배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가 다섯 살 때 제단 뒤 사다리에 앉아 감실을 향해 몸을 구부리고 있는 것을 본 누나가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자, 그는 “이렇게 하면 예수님 말씀을 더 잘 들을 수 있거든요.” 하고 대답하였다.
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는 12살 때 첫영성체를 하고 사제직에 대한 소명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또래 아이들 정도의 교육만 받고 자신과 함께 기름 짜는 일을 하면서 가업을 잇기를 바랐다. 그는 사제가 되려면 라틴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아버지 일을 도우면서 몰래 독학으로 라틴어 공부를 계속했다. 17살이 되었을 때 부모로부터 결혼 이야기를 듣고 사제가 되려는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피력해 겨우 아버지의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없어서 이듬해 그르노블에 있는 한 사제의 사제관 일을 돕는 조건으로 라틴어를 배우러 갔다. 하지만 정신병원 원장이었던 신부로부터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 갑자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한동안 집에 머물렀는데, 당시 프랑스 사회는 프랑스 혁명 이후 신앙과는 거리가 먼 세속적인 국가로 변해가고 있었다. 1829년 그가 18살이 되었을 때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봉헌회’(Congregatio Oblatorum Beatae Mariae Virginis, O.M.V.) 소속 선교사들이 마을로 설교하러 왔고, 그들의 설교에 깊은 감명을 받은 아버지는 비로소 그가 수도회에 입회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는 마르세유(Marseille)에 있는 수도회 수련소에 입회하였다. 그는 그동안 소망했던 열망을 실현하는 듯했으나 심각한 병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가자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는 사제로부터 병자성사를 받고 다행히 건강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보통 오블라티 선교 수도회로 불리는 원죄 없으신 마리아 봉헌 선교 수도회(The Missionary Oblates of Mary Immaculate/Oblati Mariae Immaculatae, O.M.I.)의 설립자이자 나중에 마르세유의 주교가 된 성 에우제니오 드 마제노(Eugenius de Mazenod, 5월 21일) 신부의 도움으로 1831년 20살의 나이에 그르노블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1834년 7월 20일 23살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샤트(Chatte)와 몽생테이나르(Mont Saint-Eynard) 본당에서 5년간 사목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성체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신심 깊고 헌신적인 사제로 기억되었다. 하지만 그는 본당 사목보다는 수도회에 들어가 수도자로 살고 싶은 강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마침 그는 장 클로드 콜린(Jean-Claude Colin) 신부에 의해 설립되고 1836년 교황청의 설립 승인을 받은 마리아회(Society of Mary/Marists/Societas Mariae, S.M.)의 몇몇 회원들을 만나게 되면서 마리스트 회원이 되기 위해 주교의 허락을 청하였다. 1839년 8월 20일, 그는 마리스트회에 입회하여 수련기를 마친 후 벨리(Belley) 소신학교의 영적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845년에 리옹(Lyon) 수도원의 관구장이 되었다. 평소 성체에 대한 신심이 깊었던 그는 한번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에 신비한 체험을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나의 영혼은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나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그분의 현존을 전하겠습니다.”라고 다짐하였다. 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 신부는 1851년에 리옹의 노트르담 드 푸르비에르 대성당(Basilique Notre-Dame de Fourviere)을 순례하면서 성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만을 위한 수도회가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성체성사의 신비에 헌신하는 ‘성체 사제회’ 설립을 구상하였다. 그는 장상들의 권유로 라세인쉬르메르(La Seyne-sur-Mer)에 4년을 더 머물면서 수도회 설립을 더 구체화하였다.
결국 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 신부는 1856년 마리아회 총장의 승인을 받고 마리아회를 떠나 새로운 수도회 설립에 헌신하게 되었다. 그는 성체조배를 위한 사제회의 설립 계획을 세워서 12일 동안이나 파리(Paris)의 대주교를 설득하여 승인을 받았다. 그래서 1857년 1월 6일, 성체성사 사제회 또는 성체성사 수도회(Congregatio Presbyterorum a Sanctissimo Sacramento, Societas a Sanctissimo Sacramento, S.S.S.)가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성체성사 사제회는 성체성사의 신비에 대한 신심과 공경을 장려하는 것을 자신들의 사명으로 삼았다. 그는 파리 앙페르(Enfer) 거리에 첫 번째 공동체를 마련해 어린이들의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교육을 시작하고, 신앙에 무관심한 신자들을 찾아가서 다시 영성체에 참여하도록 권유하였다. 설립 초기에 그는 회원 모집과 재정난 그리고 지속적인 성체조배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그는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던 아르스(Ars)의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Joannes Baptistae Maria Vianney, 8월 4일)의 격려를 받으며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그리고 1858년에 여성들을 위한 지부로 ‘성체성사 시녀회’(Servants of the Blessed Sacrament/Societatis Ancillarum a Sanctissimo Sacramento, S.S.S.)를 마르그리트 기요(Marguerite Guillot) 수녀와 함께 설립하였다. 1863년에 교황 비오 9세(Pius IX)는 그의 수도회를 칭찬하는 서한을 보내면서 새 수도회를 공식 승인하였다.
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는 1859년에 마르세유(Marseille)에 두 번째 그리고 1862년에는 앙제(Angers)에 세 번째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러면서 수도회는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그의 삶과 활동은 지속적인 성체조배, 40시간 성체조배, 어린이 첫영성체, 성체 대회 등을 통해 성체성사에 대한 신심을 증진하는 데 집중하였다. 생애 마지막 4년 동안 그는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통받았는데, 1868년 7월 쓰러졌을 때 의사로부터 즉시 파리를 떠나 휴양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탈진한 상태로 고향인 라뮈르에 도착했으나 그해 8월 1일 57살의 나이로 선종하여 시립 묘지에 묻혔다. 1877년 그가 설립한 수도회는 그의 유해에 대한 이장 허가를 받아 파리의 성체 성당으로 옮겨 모셨는데, 관을 열었을 때 그의 시신은 여전히 부패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그는 1925년 7월 12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62년 12월 9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첫 번째 회기 중에 교황 성 요한 23세(Joannes XX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리고 33년 뒤인 1995년 12월 9일에 로마 보편 전례력 8월 2일 목록에 선택 기념일로 등재되었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그를 ‘성체성사의 사도’라고 칭송하였다.
“성체를 영하는 것은 거룩해지기 위함이지 이미 거룩하기 때문이 아닙니다.”라며 성체성사의 중요성을 강조한 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 신부가 선종한 날은 8월 1일이지만 그의 전례 기념일(축일)은 8월 2일에 지내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1일 목록에서 프랑스 이제르(Isere) 지방 라뮈르 마을에서 다음날 축일을 지내는 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 신부가 선종했다고 적었다. 그리고 8월 2일 목록에서 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 신부는 처음에는 교구 사제였으나 나중에 마리아회 회원이 되었고, 성체 신비에 대한 깊은 신심을 갖고 있었던 그는 성체 신심을 장려하고 전파하기 위해 남성과 여성 두 개의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했으며, 프랑스 그르노블 근처 라뮈르 마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하였다. 프랑스어로는 그를 성 피에르-줄리앙 에이마르(Pierre-Julien Eymard)로 부른다.♣
참고자료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상) - '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 사제',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389-390쪽.
페르디난트 홀뵉 저, 이숙희 역, 성체의 삶을 위한 성체와 성인들 - '베드로 율리아노 에이마르도 성인', 서울(성요셉출판사), 2000년, 367-3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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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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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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