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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 안성 성당(구 구포동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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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기본정보
간략설명 공베르 신부의 열정이 서려 있는 안성 포도의 고향
지번주소 경기도 안성시 구포동 80-1 
도로주소 경기도 안성시 혜산로 33
전화번호 (031)672-0701
팩스번호 (031)672-1004
홈페이지
전자메일 anseong@casuwon.or.kr
문화정보 경기도 기념물 제82호
  • 안성 본당 초대주임 공베르 신부 흉상.경기도 지역 초기 본당 중의 하나로 현 수원교구 소속. 경기도 안성시 구포동 80-1 소재. 1900년 10월 19일, 충청도의 공세리 본당(貢稅里本堂)으로부터 분리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착한 의견의 모친. 관할 구역은 안성시 동쪽 지역과 보개면 · 서운면 · 금광면 일부.

    공소 시대  안성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이미 박해 시대로,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를 전후해서는 이웃의 죽산(竹山)과 안성군 소촌만면(所村萬面, 현 대덕면)의 모산리와 명당리, 서리면(西里面, 현 안성시)의 계촌 등지에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들 중 몇몇은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러나 이들 공동체는 박해로 와해되어 버렸고, 훗날 순교자들의 후손이나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신자들이 모여 새로 교우촌을 이루게 되었다. 기록에서 이들 교우촌의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1883년으로, 당시 충청도와 경기도 남부 지역을 담당하던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가 그 해 안성 지역을 방문하고 ‘바울 공소’(현 안성시 미양면 馬山里의 岩洞)를 설립하였다. 두세 신부는 이때 죽산과 직산(稷山) 등지에도 공소를 설립하였고, 다음해에는 ‘궁말 공소’(현 충남 천안시 성환읍 安宮里)를, 1887년에는 ‘선바위 공소’(현 안성시 금광면 梧山里의 立岩)를 설립하였다.

    1922년 공베르 신부가 건립한 옛 안성 성당 외부. 1985년 6월 경기도 기념물 제82호로 지정되었다.이후 안성 지역은 수원 갓등이(현 왕림) 본당에 있던 앙드레(Andre, 安學吉) 신부, 충청도 간양골 본당(현 충남 예산군 예산읍 間良里)의 파스키에(Pasquier, 朱若瑟) 신부가 차례로, 혹은 지역별로 사목을 맡게 되면서 공소가 확대되었다. 그러다가 1895년 공세리 본당이 설립된 뒤에는 그 초대 주임인 드비즈(Devise, 成一論) 신부가 천안 · 직산 · 진천 등과 함께 안성 지역의 공소들을 순방하였으며, 1896년 경기도 미리내 본당이 설립된 뒤에는 이곳의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신부가 안성 북쪽 일부 지역을 맡아보았다. 또 1900년 1월에는 제8대 조선교구장인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이 지역을 방문하였는데, 당시 안성 일대의 신자수는 7~8개 공소에 모두 350명 가량이었다.

    본당 설립과 정착  안성 지역의 신자들이 본당 설립 운동을 펴게 된 것은 뮈텔 주교가 이곳을 방문한 뒤였다. 당시 이 지역의 신앙 중심지는 바울 공소와 질구비 공소(현 안성시 미양면 後坪里), 갈전리 공소(현 안성시 미양면 葛田里) 등지였으며, 안성읍에는 한 가족만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차 설립될 본당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읍내에 성당과 사제관이 건립되어야만 했고, 이에 신자들은 드비즈 신부와 협의하여 구포리에 있던 현재의 성당터를 매입하고, 그 자리에 있던 기와집 21칸을 성당(8칸)으로 개조한 다음, 1900년 9월 드비즈 신부의 집전 아래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이렇게 하여 기본 여건이 갖추어지게 되자 드비즈 신부는 즉시 뮈텔 주교에게 서한을 보내 본당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그 결과 1900년 10월 19일자로 안성 본당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

    목재를 이용해 한식으로 장식한 옛 성당 내부.이때 뮈텔 주교가 안성 본당의 초대주임으로 임명한 사람은 10월 9일 동생인 공베르(J. Gombert, 孔安世)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한 형 공베르(A. Gombert, 孔安國) 신부였다. 당시 그는 한국말을 배우기도 전에 본당에 부임했으므로 첫 해에는 드비즈 신부가 계속 공소 순방을 해주었고, 이듬해 가을부터 비로소 공베르 신부 자신이 공소 순방에 나서게 되었다. 초창기 안성 본당의 관할 구역은 지금의 안성시, 평택시, 천안시, 진천시 등으로 공소수는 모두 19개소였고, 신자수는 600여 명이었다. 공베르 신부는 이후 1909년 1월, 사립 초등학교인 안법 학교(安法學校, 현 안법고등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여 자비로 운영하기 시작하였으며, 일제 초기인 1912년에 여자부를 함께 신설하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교사 수녀 2명을 초빙하였다. 이 수녀회에서는 이후 현재까지 본당의 전교를 돕고 있다. 또 공베르 신부는 1919년 3 · 1 운동 때에는 만세를 부르다가 왜경에게 쫓기던 사람들을 성당 안으로 들여보내고, 사제관 앞에 프랑스 국기를 게양한 뒤 치외 법권을 주장하며 왜경의 성당 진입을 막아 피신한 사람들을 보호하였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 모금한 기금으로 전답을 매입하여 소작 농민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가난한 농민들을 도왔고, 흉년이 들면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등 빈민 구제 활동도 벌였다.

    덕원 수도원 목공부 출신 원제동 씨가 1925년에 제작한 제대 뒷벽면 목조 장식이 독특하다.
    한편 공베르 신부는 여러 해 동안 성당 신축 기금을 모금해 왔는데, 1922년에 어느 정도 기금이 모아지게 되자 신자들의 협력을 얻어 3월에 성당 건립 공사를 시작, 8월 15일 성모 몽소 승천 대축일에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리고 10월 4일 서울교구의 보좌 주교로 있던 드브레(Devred, 兪世俊) 주교의 집전으로 성당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 성당(건평 80평, 경기도 기념물 82호)은 한식(내부)과 바실리카 양식(외부)을 절충한 형태로, 초기 성당사에서 나타나는 토착화의 양식을 잘 반영하였다. 당시 공베르 신부는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의 설계를 토대로 중국인 기술자의 힘을 빌려 이를 완공하였는데, 기와와 돌 등은 안성군 보개면 동안리에 있던 유교 강당을 헌 자료를 이용하였고, 목재는 압록강변과 서산 지방의 것을 이용하였다. 그는 또 2년 뒤인 1924년 1월, 안법 학교 개교 15주년을 맞아 ‘안성 천주교 소년회’를 창립하였다.

    성장과 분할  공베르 신부는 당시 안성 일대뿐만 아니라 천안군 목천면 일부, 진천군 백곡면 일부, 평택과 그 인근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중 1914년 행정 구역이 개편되면서 진위(振威) 군청이 자리잡게 된 병남면 평택리(현 평택시) 인근의 통복(通伏) 공소가 장차 발전할 가능성이 커지게 되었다. 이에 공베르 신부는 1926년 12월 6일부터 수원군 태장면 병점(餠店, 본래 갓등이 본당 소속)에 근거지를 두고 전교 활동을 하던 몰리마르(Molimard, 矣) 신부와 협의하여 현 평택 성당 위치에 부지를 매입하고, 1928년 초 몰리마르 신부를 이곳으로 이전토록 하였다. 이로써 ‘평택 본당’은 안성 본당에서 분할된 최초의 자본당이 되었다. 그러다가 공베르 신부는 1932년 9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전임되고, 미리내 본당에 있던 뤼카(F. Lucas, 陸加恩) 프란치스코 신부가 제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가 1934년 6월 28일에 사망함으로써 그해 8월, 황해도 은율 본당에 있던 이순성(李順成) 안드레아 신부가 부임하게 되었다.

    본당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옛 성당 옆에 노출 콘크리트 기법으로 건축된 새 성당 외부.이후 본당은 여러 신부가 거쳐 가면서 어느 본당 못지않은 성장을 보게 되었다. 우선 이순성 신부는 본당에 부임한 뒤 냉담자 회두, 외교인 입교 권면, 상가 방문 등을 활발하게 전개하였고, 오늘날의 레지오 마리애나 연령회와 비슷한 ‘예수 성심 전교회’를 창설하였다. 또 제4대 이복영(李福永) 요셉 신부는 1936년 안법 학교 교사를 증축하고 4년제에서 6년제 초등 학교로 발전시켰으며, 다음해 4월 16일 정규 보통 학교로 인가받았다. 제7대 김제근(金濟根) 토마스 신부는 1947년 9월 안법중학교를 인가받아 개교하였고, 제8대 임세빈(林世彬) 요셉 신부는 1950년 4월 교사 신축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이 공사는 6 · 25 동란으로 중단되었다가 임 신부가 제10대 주임으로 다시 부임하여 1954년 10월 연건평 258평의 2층 벽돌 교사로 준공하게 되었다. 임 신부는 다음해 고딕식 벽돌조로 종탑부를 증축하고 독일에서 주문한 종을 설치하였다. 이 무렵 본당 소속인 갈전리 공소의 신자들은 본당 승격을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제12대 정욱진(丁旭鎭)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때부터 본격적인 준비 작업을 시작하여 1959년 11월 ‘갈전리 본당’(葛田里本堂)으로 독립함으로써 안성읍 남쪽의 미양면 대부분 지역이 신설 본당으로 편입되었다. 이어 제15대 강주희(姜周熙) 방그라시오 신부 재임기인 1963년 3월에는 옛 안법보통학교 건물을 개조하여 ‘소화 유치원’(현 안법 유치원)을 개원하였고, 1963년 10월 7일 수원교구 설정으로 본당이 서울대교구에서 새 교구로 편입되었으며, 1966년 1월에는 안법 학교의 경영을 교구에서 맡게 되었다.

    빛의 흐름을 강조한 100주년 기념성당 내부.1970년 7월 20일, 안성 본당은 다시 한 번 분할됨과 동시에 그 명칭이 ‘구포동 본당’으로 개칭되었다. 이때 분리 신설된 본당은 ‘대천동 본당’(大泉洞本堂)으로, 여기서는 안성읍 서쪽과 군내의 서북쪽 지역을 관할하였다. 이어 제21대 주임 이정운(李淨雲) 베드로 신부는 1975년 10월 수녀원을 신축하였고, 다음해 ‘죽산 순교자 기념 성당 건립 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이를 추진해 나갔는데, 1981년 11월 5일에 죽산 공소가 준본당으로 승격(1983년 7월 22일 본당으로 승격)됨으로써 본당은 모두 4개의 자본당을 갖게 되었다. 이후 본당에서는 1985년 6월 기존의 성당이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제24대 서명석(徐明錫) 안드레아 신부 재임 때인 1987년 11월 문화재 보수 사업에 의해 성당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그리고 1992년 1월 27일 금광면의 ‘던지실 본당’이 분리 신설됨으로써 본당의 관할 구역이 현재와 같이 축소되었다. [출처 : 차기진, 한국가톨릭대사전 제2권, 1995년]

    구포동 본당은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을 전개하면서 2000년 1월 1일 본당 명칭을 안성 본당으로 변경하여 옛 이름을 되찾았다. ‘100년에서 다시 태어나는 100년’을 주제로 다양한 기념행사를 가진 안성 본당은 2000년 10월 3일 본당 설정 100주년 기념식 및 기념성당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또한 초대 주임인 공 안토니오 신부 흉상 제막식, 로고스(Logos) 탑과 미래를 준비하는 십자가 축복식도 함께 이루어졌다. 11m 높이의 로고스 탑은 안성 지역에 하느님의 ‘말씀’이 뿌리내린 지 100주년을 기념하는 탑으로 관련 자료들을 탑 속에 넣어 100년 타임캡슐 봉안식도 가졌다. 100주년 기념성당 옆에 설치되어 본당 설립 200주년을 준비하는 ‘미래의 십자가’는 총길이 18m에 무게만도 13t에 이른다.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성당은 경기도 기념물 제82호인 붉은 벽돌의 옛 사적지 성당 모습을 살리기 위해 전혀 다른 모습의 노출 콘크리트 기법의 흰색 건물로 건립되었다. 윤성호 교수가 설계한 총건평 840여평, 지하 1층 지상 2층 기념성당은 옛 성당과 절묘한 신구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옛 성당에서는 ‘빛의 은은함’이 느껴진다면 새 성당은 오히려 ‘빛의 흐름’을 강조했다. 제대 위에 사각형의 천창(天窓)을 배치하여 말씀을 뜻하는 빛의 생명력을 강조했고, 성당 입구 상부 벽에는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세 개의 사각형 창을, 신자석 옆에도 창을 두어 성당이 일종의 ‘빛통’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도록 했다.

    2005년 5월 축복식을 가진 안성 성당(구 구포동 성당) 100주년 기념관.안성 본당은 2005년 5월 28일 안성 성당 100주년 기념관 축복식을 가졌다. 2000년 본당설립 100주년을 맞으며 100년이 넘는 역사를 보존 ․ 계승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왔고, 한옥 구조가 그대로 남아있는 옛 성당 건물은 경기도 기념물로서 신자들은 물론 지역주민들의 관심도 높은 점을 감안하여 옛 성당 옆 터에 지하 1층(성체조배실), 지상 1층(전시실, 유물연구실) 규모의 기념관을 건축하였다. 전시실에는 100년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진과 옛 성직자들이 사용했던 전례용구를 비롯해 각종 교리서와 성경 등이 전시되어 있다.

    안성 성당하면 초대 주임 공베르 신부와 포도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1901년 성당 마당에 무심코 심은 독일산 포도 묘목이 의외로 탐스런 과실을 맺자 공베르 신부는 안성 지역이 포도재배에 적합한 기후 및 토양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선교활동과 함께 지역민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서도 큰 힘을 기울이던 공베르 신부는 여러 차례 프랑스를 오가며 안성의 토질과 기후에 적합한 포도 종자를 찾았고, 이를 적극 보급해 안성 포도의 효시가 되었다. 또 성당 주변의 토지 50만 평을 매입하여 이웃들이 경작할 수 있도록 임대하며 지역민 전체를 품어 안았다. 안성에서 32년 동안 신자들을 돌보던 공베르 신부는 6 ․ 25 동란 때 체포되어 납북, 죽음의 행진을 계속하다가 1950년 11월 12일 동사하였다. 한편 안성문화원은 2012년 5월 공베르 신부를 ‘안성을 빛낸 인물’로 선정하고 흉상 제막식을 가졌다. [출처 : 관련 신문기사를 중심으로 편집(최종수정 2013년 4월 30일)]

    옛 안성 성당은 서양식 성당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전통적인 재로와 방식으로 건립되어 토착화된 성당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당 입구에서 본 모습. 왼쪽이 2000년 10월에 축복식을 가진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성당, 오른쪽이 1922년에 건립된 옛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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