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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0.23)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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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요한 (John)
성인 기본정보
축일 10월 23일
신분 신부, 설교가
활동지역 카페스트라노(Capestrano)
활동연도 1386-1456년

  •    성 요한네스(Joannes, 또는 요한)은 이탈리아 중부 아브르초(Abruzzo) 지방의 카페스트라노에서 1386년 6월 24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안토니오 남작이 1399년 전투 중에 사망해 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러다가 1406년 페루자(Perugia)로 가서 법률을 공부하고, 1412년에 나폴리(Napoli)의 왕 라디슬라우스(Ladislaus)에 의해 페루자의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 행정관이 된 그는 정치적 부패와 부정 척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1416년 페루자와 말라테스타(Malatesta)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평화를 제안하는 사절로 말라테스타에 파견되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포로가 되어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 당시 성 요한은 전쟁 직전에 산 발렌티노(San Valentino) 백작의 딸과 결혼한 상태였으나 혼인이 완결된 상태는 아니었다. 브루파(Brufa) 감옥에 갇힌 그는 진지하게 영혼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오자 수도자가 되기 위해 혼인에 대한 관면을 받고 1415년 10월 4일 페루자에 있는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오누프리우스 데 세자노(Onuphrius de Seggiano)의 지도를 받으며 수련을 받았다. 이듬해에 서원을 하고 시에나(Siena)의 성 베르나르디노(Bernardinus, 5월 20일)의 문하생으로 공부하다가 1420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즉시 설교자로 나서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수많은 이들을 개종시켰고, 많은 이들이 수도 생활에 관심을 두고 수도원 문을 두드리도록 만들었다. 또한 그는 1425년에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와 함께 순회 설교를 했고, 1426년에 성 베르나르디노가 ‘예수 성명’ 신심에 대한 문제로 이단으로 비판받았을 때 교황 마르티노 5세(Martinus V) 앞에서 그를 변호해 무죄를 받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작은 형제회의 프라티첼리파(Fraticelles)를 반대하는 설교를 했고, 1429년에 작은 형제회의 내분을 종식하기 위해 교황이 소집한 총회에 엄격주의파(오늘날의 작은 형제회)의 대표로 참가하기 위해 로마로 갔다. 그러한 노력으로 1430년에 수도회 개혁과 통합을 위한 회칙이 선포되어 잠시나마 일치를 누리기도 했으나 곧이어 콘벤투알 성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이 교황의 칙령을 받아 개혁과 통합의 노력이 성공하지는 못했다.

       성 요한은 1435~1436년에 교황특사로 활동했고, 1436년 12월에는 그의 노력 덕분에 작은 형제회 제3회 회원들이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1437년에는 페라라(Ferrara)에 있는 ‘성녀 클라라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의 개혁 작업을 도왔다. 1439년 말에는 예루살렘 성지를 방문하였고, 1440~1442년까지 밀라노(Milano)에서 설교와 저술 활동을 하였다. 1442년 말과 1443년에는 부르고뉴(Bourgogne)와 플랑드르(Flandre) 지방을 방문하여 필리프 3세가 대립교황인 펠릭스 5세(Felix V)와 동맹을 맺지 않도록 설득하였다. 그는 수도회의 총대리, 관구장 등을 역임하며 여러 개의 수도원을 세우고 개혁 작업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1451년에 그는 교황과 독일 황제의 요청으로 후스파(Hussite)의 개종을 위해 오스트리아로 파견되었다. 그는 설교와 저술을 통해 후스파가 가톨릭교회로 돌아오도록 노력했으나 그들의 중심지인 프라하까지 가지는 못했다. 그즈음에 튀르키예 군대와 맞서는 십자군의 상황은 상당히 비관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1454년에 설교를 통해 십자군의 필요성을 촉구하라는 명을 받고 이듬해 5월 헝가리로 갔다. 그의 열정적인 활동 덕분에 1456년 7월 초에 십자군을 모아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Beograd)로 인솔하였다. 그는 그해 9월 1일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동쪽 끝에 있는 국경도시 일록(Ilok)에 도착한 후 당시 군대의 비위생적인 상태에서 만연한 전염병에 걸려 10월 23일 선종하였다.

       그가 선종한 후 그에 대한 신자들의 공경이 곧 시작되어 1514년에 술모나(Sulmona) 교구 내에서 그에 대한 공경이 허락되었고, 1690년 10월 16일 교황 알렉산데르 8세(Alexander V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 요한에 대한 공경은 1880년에 보편 교회로 확산하면서 1890년 로마 보편 전례력의 3월 28일에 올라 기념해 왔다. 1969년 로마 보편 전례력 개정 이후 그의 축일은 선종한 날인 10월 23일로 옮겨 기념하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과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모두 10월 23일 목록에서 작은 형제회의 사제인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이 엄격한 수도 규칙과 가톨릭 신앙을 지키기 위해 유럽 전역에서 직무를 수행했고, 튀르키예 군대에 맞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지키는데 헌신하다가 헝가리 왕국의 일록 근처에서 선종했다고 기록하였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1984년에 그를 군종신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그는 카피스트라노(Capistrano)의 성 요한으로도 불린다.♣

참고자료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 사제',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229-231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 - '요한, 카피스트라노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2년, 6583-6584쪽.
  •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카페스트라노의 성요한 사제', 서울(성바오로), 2002년, 273-2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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