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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리비오 데 모그로베호(3.23)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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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투리비오 데 모그로베호 (Turibius de Mogrovejo)
성인 기본정보
축일 3월 23일
신분 대주교
활동지역 리마(Lima)
활동연도 1538-1606년

  •    성 투리비우스 데 모그로베호(또는 투리비오 데 모그로베호)는 1538년 11월 16일 에스파냐 오비에도(Oviedo) 교구의 레온(Leon) 근처에 있는 빌라케히다(Vliiaquejida) 또는 레온 교구의 바야돌리드(Valladolid)에서 부유한 지주 집안의 1남 4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토리비오 알폰소 데 모그로베호(Toribio Alfonso de Mogrovejo)이고, 그의 누이 중 셋이 나중에 수도자가 될 정도로 신심 깊은 가정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제대를 만들고 꾸미기를 좋아했던 그는 가난한 이와 음식을 나누기 위해 엄격한 금식을 실천했고,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는 등 성모 신심 또한 깊었다. 그는 청소년기에 바야돌리드에서 인문학을 배우고 1562년 삼촌이 있는 살라망카(Salamanca)로 가서 교회법과 시민법을 공부하였다. 그 후 산 살바도르 데 오비에도(San Salvador de Oviedo)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한 후 1574년 7월 그라나다(Granada)의 종교 재판관에 임명되었는데, 사제가 아닌 평신도가 교회법원의 수장이 된 파격적 결정이었다. 그는 많은 이들이 주목하는 가운데 5년 동안 주어진 임무를 신중하고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1575년 당시 신세계였던 라틴 아메리카 페루 리마의 대주교가 선종하면서 주교좌가 공석이 되었을 때, 많은 사람이 거대한 나라인 페루의 교회를 잘 이끌고 비신자들의 회개에 장애가 되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훌륭한 인물로 성 투리비오 데 모그로베호를 지목하였다. 당시 국왕인 펠리페 2세는 1578년 그를 리마의 대주교로 교황 그레고리오 13세(Gregorius XIII)에게 추천하였다. 자기 뜻과는 관계없이 주교 후보에 오른 그는 왕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은 그와 같은 일을 감당할 능력도 없고 평신도로서 교위 성직자가 되는 것은 교회법에 어긋난다고 호소하였다. 하지만 중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그는 주일마다 소품과 차부제품을 받았고, 1579년 3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에 의해 리마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라나다에서 부제품과 사제품을 받고, 1580년 세비야(Sevilla)에서 주교로 축성된 후 그해 9월 페루를 향해 떠났다.

       당시 리마 교구는 안데스산맥의 험준한 지형에 흩어져 사는 가난한 원주민과 그들을 비인간적으로 대하며 착취를 일삼던 유럽의 정복자들이 섞여 있었다. 게다가 내전과 내분까지 겹쳐 힘겨운 상태였다. 1581년 5월 11일 리마 교구에 부임한 그는 즉시 수많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교구 전체에 대한 사목 방문을 시작하였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가난한 인디오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이 교회의 가르침과 성사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1583년 8월 15일 개최된 제3차 리마 교구 교회 회의를 시작으로 2년마다 회의를 개최하였고, 7년마다 지구 시노드를 열면서 교회를 개혁하고 성직자들의 쇄신과 원주민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원주민들의 권익을 옹호하다가 정부 당국과 분쟁에 휘말렸고, 통치자들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았다. 그는 이러한 모든 모욕과 공격을 이겨내면서 복음의 정신에 입각한 정의와 진리를 지켜갔다. 그리고 원주민에 대한 통치자들의 부당한 착취를 근절해가며, 가난한 이들을 향해 교회의 따뜻한 손길을 펼쳐 나갔다. 그는 나라 안에 수많은 교회와 병원을 세웠고, 1591년에는 신세계 최초의 신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그는 인디오 언어로 설교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교구 내의 모든 지역을 여러 차례 사목적으로 방문하는 열성을 보였다. 첫 번째 사목 방문이 7년 걸렸고, 두 번째는 4년, 세 번째는 이보다 좀 더 짧은 기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는 1606년 교구 사목 순시 중 사냐(Sana)에서 병을 얻고 말았다. 죽음을 예감한 그는 자신을 돕던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가 갖고 있던 것을 모두 나누어 주라고 유언한 후 성당으로 가서 병자성사를 받고 3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다음 해에 리마로 옮겨졌는데, 그때까지 부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1679년 교황 인노첸시오 11세(Innocent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726년 교황 베네딕토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페루 교회가 많은 성인과 뛰어난 목자를 배출하고, 수많은 신학교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병원들을 건립한 것은 그의 열정과 노력의 결과였지만, 그는 결코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만큼 겸손한 사목자였다. 1671년 아메리카 대륙의 첫 번째 성인으로 시성된 리마의 성녀 로사(Rosa, 8월 23일)와 1962년 성인품에 오른 성 마르티노 데 포레스(Martinus de Porres, 11월 3일)는 모두 그에게 견진성사를 받았었다. 그는 페루에 전해진 그리스도교 신앙을 원주민의 입장에 서서 널리 확산시키고 성장시킨 대표적인 성인이었다. 그는 페루와 라틴 아메리카의 주교들 그리고 원주민 인권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과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모두 3월 23일 목록에서 그에 대해 전해주었다. 개정 “로마 순교록”은 본래 에스파냐 출신의 평신도이자 법률 전문가였던 성 투리비오 데 모그로베호가 페루 리마의 주교로 축성되어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서 사도적 열정으로 광대한 교구를 여러 차례 방문하며 부지런히 양 떼를 돌보고, 원주민의 권리와 교육에 힘쓰다 선종했다고 기록하였다.♣

참고자료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성 투리비오 데 모그로베호 주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403-404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1권 - '투리비오 데 모그로베호',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5년, 8729-8730쪽.
  •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성투리비오 몽그로베요 주교', 서울(성바오로), 2002년, 80-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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