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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구원, 현실에 없는 유토피아

7021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6-04-07

[가톨릭 교리] 구원, 현실에 없는 유토피아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헤테로토피아

 

‘유토피아’(Utopia)는 영국의 사상가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가 1516년 자신이 지은 소설의 제목인 《유토피아》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그리스어 ‘ou’(없다)와 ‘topos’(장소)를 조합한 말로써, 이 단어의 뜻은 ‘어디에도 없는 장소’입니다. 즉, 유토피아는 ‘현실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회’ 내지 ‘존재하지 않는 지상낙원’을 일컫는 말입니다. 간혹 ‘이상향’(理想鄕)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반대말로 ‘디스토피아’(Dystopia)가 있는데, 이는 ‘지옥향’이나 ‘암흑향’이라 번역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1949년 출간된 조지 오웰의 소설인 《1984》에서 묘사된 사회, 즉 유토피아를 꿈꾸었으나, 전체주의와 권위주의를 통해 결국 폐쇄적으로 변해버리는 사회, 이런 사회를 흔히 디스토피아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철학자인 미쉘 푸코는 이 두 개념을 근거로 해서 전혀 새로운 개념인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를 제시합니다. ‘헤테로’(hetero)라는 단어는 ‘다른’, ‘이질적인’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온 접두사인데, 결국 이 새로운 단어는 고된 현실이나 일상을 벗어나게 해주고, 동시에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휴식과 위로를 제공해 주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유명 휴양지나 놀이동산처럼 유토피아를 현실에 재현해낸 경우를 말합니다. 이 개념을 통해 그 철학자가 의도하는 바는 ‘유토피아’라는 것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우리 삶에는 그저 잠시의 위로와 위안을 주는 헤테로토피아가 존재할 뿐이고, 단지 이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고 있는 종교는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단지 헤테로토피아를 제공해 주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수도원에서 이루어지는 피정 프로그램이라든가. 사찰에서 마련한 템플스테이 등의 프로그램은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에게 잠시의 위로와 위안을 제공해 줍니다. 따라서 일종의 헤테로토피아라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수도원이나 사찰은 방문자에겐 헤테로토피아이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에겐 유토피아와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수도원에 사는 수도자는 세속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스스로 추방시킨 사람입니다. 수도원 공동체는 세속과 다른 삶의 방식을 사는 곳이고, 뚜렷한 목적을 지니고 살며, 세속의 흐름과 권력을 거슬러 싸우고 있는 영적인 전쟁터와 같은 곳입니다. 따라서 만일 이 전쟁에서 이기면 수도원은 유토피아가 되는 것이고, 실패한다면 디스토피아나 헤테로토피아가 됩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이고,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이며, 우리 각자의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편하고 쉬운 길이 아닙니다

 

가끔 우리는 왜 하느님은 인간의 고통과 슬픔 앞에 이토록 침묵하고 계신가를 묻곤 합니다. 고단한 삶의 현실 앞에서 그저 침묵하고 계시는 하느님께 내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을 믿어도 되는 것일까 하고 자연스레 묻게 됩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고통과 슬픔에 지친 사람을 어렵지 않게 봅니다. 특히 무죄한 이들이 고통받는 상황도 자주 보게 됩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고 하는데, 그리고 그 하느님이 우리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신다고 하는데, 그런데 세상에는 왜 이리 고통이 많을까요? 가끔 어린이 병동을 방문하여 어린아이가 통증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볼 때나 그 옆에 있는 젊은 부모의 모습을 볼 때면, 때로는 제가 알고 있는 신학 지식이 그 순간에는 아무 쓸모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게다가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고 조롱하고 의심하는 것은 참아 견딜 수 있는데,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고통 중에 의심하고 힘들어할 때는 적당한 위로의 말을 찾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지금 겪는 고통을 통해 결국 더 큰 기쁨을 얻게 되리라는 위로의 말이나, 혹은 고통은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데 도움을 준다는 희망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중에 더 큰 기쁨을 얻기 위해 지금의 고통을 그저 참고 견디라는 말을 쉽게 하기도, 그냥 받아들이라고 하기도 참 어렵습니다. 게다가 고통이 지속된다면, 아직 믿음이 단단하지 못한 사람들이 신앙의 길을 끝까지 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앙의 길은 결코 편하고 쉬운 길이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입니다. 신앙이란 우리가 우리의 머리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을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 품고 평생을 사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가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이기에 우리가 진심으로 바라고 청할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신앙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인간의 삶과 죽음 앞에 하느님의 힘과 은총으로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고 있는 삶의 여정, 신앙의 여정을 어떻게 하면 잘 갈 수 있을까요?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는 ‘길, 진리, 생명’

 

‘인간의 삶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과 같다.’ 아빌라의 대 데레사 성녀가 하신 말씀인데, 이는 구약성경의 지혜서 5장 14절의 말씀, 즉 “(삶은) 단 하루 머물렀던 손님에 대한 기억”이란 구절에 근거합니다. 이 말씀은 인간 삶이 얼마나 순간이고, 찰나(刹那)이며, 금방 사라지는 것인지 알려줍니다. 인간 삶이 속절없이 허무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 말씀은 동시에 하느님의 영원하심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습니다.(시편 90 참조) 하느님은 영원하시고, 하느님 말씀은 언제나 진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 즉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결국에는 인간에게 주어지고 실현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는 ‘길, 진리, 생명’입니다. 이분에게 우리 삶의 길과 목적에 대한 답이 있습니다.

 

어떻게 진리를 만나고 깨달을 수 있을까요? 진정한 자유, 즉 인간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요한 8,31-32 참조). 예수님 안에 머물기 위해 예수님 말씀을 자주 듣고, 머리와 가슴에 새겨야 하고, 무엇보다 그분 몸을 내 안에 모시고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내 힘으로 무언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무언가 하시도록 조용히 머물고 협조하는 것입니다. 때로 인간은 위대한 능력을 가진 것 같지만, 결국 자기 머리카락 한 올 검거나 희게 할 수 없는 힘없고 나약한 존재이며, 언제나 죽음을 앞둔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성모님의 군단, 2026년 3월호, 조한규 베네딕토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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