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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로 스투디테(11.11)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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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테오도로 스투디테 (Theodore the Studite)
성인 기본정보
축일 11월 11일
신분 신부, 수도원장, 신학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759-826년

  •    성 테오도루스 스투디타(Theodorus Studita, 또는 테오도로 스투디타/스투디테)는 759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오늘날 튀르키예의 이스탄불[Istanbul])에서 황실 재무 관리의 세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780년경 소아시아 북서부 비티니아(Bithynia) 지방 올림푸스(Olympus) 산과 프루사(Prusa) 산의 사쿠디온(Sakkoudion)에 있는 가족 사유지에 설립된 수도원에 동생 요셉(Josephus)과 함께 들어가 수도승이 되었다. 그는 올림푸스 산의 심볼레온(Symboleon) 수도원의 원장직을 사임하고 사쿠디온 수도원의 원장으로 온 성 플라토(Plato, 4월 4일)의 조카였다. 성 플라토는 수도 생활에 정진하는 조카의 신심과 자질을 알아보고 그에게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사제직을 준비하도록 권했다. 성 테오도로는 787년에 사제품을 받고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794년에는 성 플라토를 계승하여 수도원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와 성 플라토는 황실의 내분에 휘말려 고초를 겪게 되었다. 성 테오도로와 성 플라토는 본처를 버리고 궁녀였던 테오도타(Theodota)와 재혼하는 콘스탄티누스 6세 황제의 행위를 맹렬히 비난했고, 그 결과 수도원은 폐쇄되고 성 테오도로와 수도승들은 796년에 그리스의 테살로니카(Thessalonica)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성 플라토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가택 연금 상태에 들어갔다. 하지만 다음 해에 황제의 어머니가 권력을 잡으면서 성 테오도로는 다시 사쿠디온 수도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아랍인들의 공격을 피해 799년에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다. 황후는 그에게 5세기에 설립되어 당시 쇠락의 길로 들어선 스투디오스(Stoudios) 수도원을 맡아줄 것을 제안하였다. 그는 기존의 수도승들과 사쿠디온에서 함께 온 동료들과 함께 기존의 성당과 수도원 시설을 복원하고 새로운 작업장과 도서관 등을 건립하며 수도원 부흥을 이끌었다. 그의 지도로 스투디오스 수도원은 비잔틴 지역 수도원의 신기원을 수립할 만큼 큰 영향력을 지닌 영성과 전례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그 뒤로도 황제의 부당한 주교 임명에 반대해 감옥에 갇히고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814년 성 플라토가 오랜 투병 끝에 스투디오스 수도원에서 선종하자 그는 삼촌의 장례식을 주관하며 장문의 추도문(Laudatio Platonis)을 직접 작성했다. 그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성상 파괴 정책을 재개하는 레오 5세 황제와 맞서는 것이었다. 황제의 뜻대로 815년에 성상 파괴 정책이 시행되자 그는 신학적 원칙에 기초해 성화 사용을 옹호하고 성상파괴주의에 저항하는 대중적 조직을 이끌었다. 그로 인해 오랫동안 투옥과 유배 생활을 반복해야 했다. 820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반란이 일어나 레오 5세 황제가 암살되고 미카엘 2세 황제가 즉위하면서 그도 유배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새 황제 역시 성상 파괴를 지지하기에 성 테오도로가 수도원장으로 복귀하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성 테오도로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멀리 떨어져 지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 비티니아 지방의 여러 수도원을 다니며 생활했다. 오랜 유배와 극기 생활로 병에 걸린 성 테오도로는 826년 11월 11일 비티니아의 성 트리폰(Tryphon) 수도원에서 미사를 봉헌하던 중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18년 후에 콘스탄티노플의 스투디오스 수도원으로 옮겨져 성 플라토의 무덤 옆에 안장되었다.

       성 테오도로는 성상파괴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이자 성상 공경의 정당성을 신학적으로 정립하고 순수한 의미에서 수도회를 개혁하고자 노력한 위대한 성인이었다. 그는 세속의 권력과 교회의 권리를 구분하여 교회의 독립을 주장했던 인물이며, 교의에 관한 논쟁적인 글을 비롯해 교리서, 강론집, 찬미가 등을 남긴 신학자였다. 또한 뛰어난 서예가로도 알려졌으며 수도승들에게 예술을 장려했다고 한다. 그를 성 테오도로 스투디테(Theodore the Studite) 또는 테오도로 스투디타(Theodorus Studita)로 부르는 이유는 스투디오스 수도원의 수도승을 뜻하는 그리스어 ‘스투디테스’(Studites)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옛 “로마 순교록”은 11월 12일 목록에서 콘스탄티노플에서 성상 파괴자들에 맞서 신앙을 옹호한 성 테오도로 스투디테를 기념한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성 테오도로 스투디테가 콘스탄티노플의 수도원을 성상 파괴자들에게 박해받는 학자들과 성인들과 순교자들을 위한 공동체로 만들었으며, 세 번이나 유배되었지만 교부들의 전통을 큰 영예로 여기고 가톨릭 신앙을 설명하기 위해 교리서와 몇 가지 유명한 작품을 썼다고 했다. 아울러 축일 또한 그가 선종한 날이자 동방교회에서 기념해오던 11월 11일로 옮겨 그에 대해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