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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 나주 무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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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기본정보
간략설명 광주대교구의 유일한 순교지
지번주소 전라남도 나주시 남외동 128(나주 초등학교 교정) 
도로주소 전라남도 나주시 남외1길 16(나주 초등학교 교정)
전화번호 (061)334-2123
팩스번호 (061)334-1126
홈페이지
전자메일 naju@kjcatholic.or.kr
관련기관 나주 성당    
관련주소 전라남도 나주시 박정길 3
  • 광주대교구 내의 유일한 순교터가 있었던 나주 무학당 자리에는 현재 나주 초등학교가 들어 서 있다.지금은 그 위치조차 희미한 나주 무학당은 광주대교구 내에서는 유일하게 순교 터가 있었던 곳이다.
     
    무학당의 확실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현재 나주 초등학교 안의 한쪽 화단이 박해 당시 사형 터로 쓰였던 무학당의 원래 터였다고 전해질 뿐이다. 더구나 지금은 그나마 주춧돌 외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아 무상한 세월과 함께 후손들의 못난 신앙을 돌이켜보게 한다.
     
    나주(羅州)는 전라남도의 주읍(主邑)으로 옛날부터 크게 번창한 고장이었다. 여기에 정식으로 본당이 설정된 것은 1935년 5월의 일이다. 하지만 나주 본당의 뿌리는 1866년 병인박해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무학당에서 얼마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모진 고문 끝에 순교했는지 그 정확한 수나 사연은 알 길이 없다. 다만 "치명일기"에 이곳에서 치명한 세 분 순교자에 대한 단편적인 사연들만이 기록돼 있을 뿐이다.
     
    현 나주 초등학교 안쪽 화단 부분이 박해 당시 무학당이 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그중의 한 분은 전라북도 용담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교우가 됐다가 정읍에서 체포되어 이곳으로 압송된 것으로 알려진 강영원 바오로이다. 그는 천주학을 버리라는 강요 속에서도 굳게 신앙을 지키다가 마침내 1872년 3월 9일 백지사형(白紙死刑)으로 치명했다. 물에 적신 얇은 창호지를 여러 겹 얼굴에 발라 질식케 하는 백지사형은 그 사형 방법이 간편한 반면에 극심한 고통을 주기 때문에 박해 시대에 여러 곳에서 사용되던 사형 방법이었다.
     
    반면 전라북도 무장, 암틔라는 곳에서 살던 유치성 안드레아가 강영원과 함께 붙잡혀 나주읍으로 압송됐는데 그 역시 같은 날 처형됐다. 하지만 그는 강영원과는 달리 쏟아지는 돌더미 속에서 머리가 깨지고 뼈와 살이 으스러지는 혹독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기록에 남아 있는 마지막 순교자인 유문보 바오로는 다른 두 치명자보다 먼저 순교한 것은 확실하며, 대략 2월 12일에서 3월 9일 사이에 나주에서 옥사했다고 본다.
     
    나주 무학당 순교터 안내판.어느 한 사람 소중하지 않다 할 수 없는 이들 순교자들이 흘린 피 위에 나주 지역의 천주교는 그 터를 닦았다 하겠다. 비록 그 순교 터의 위치는 어느덧 세월의 흐름에 따라 기억하는 이도 없이 잊혀졌다 할지라도 그곳 땅과 하늘에 서려 있는 확고한 믿음은 후손들에게 길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믿음의 터를 닦은 나주에는 1933년에 와서 임시 공소가 서고 이듬해에는 대지 3천 평을 확보, 임시 성당과 사제관을 준공했으며 1935년에 들어서 비로소 본당이 설정되었다.
     
    1907년 나주 초등학교가 개교하면서 흔적조차 희미해진 무학당 순교터에 남아 있던 주춧돌 12개 중 10개를 지난 2001년 나주 성당으로 옮겨와 8개는 기념 조형물의 주춧돌로 사용하고, 2개는 십자가의 길을 시작하는 곳에 놓아 두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개의 주춧돌이 있는 나주 초등학교 화단에는 순교터 안내판을 세웠다.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3년 5월 21일)]
     
     
    무학당 순교 성지
     
    나주는 천년의 고도요 전남의 주읍(主邑)으로 옛날부터 크게 발전한 고장이었다. 여기에 지금의 본당이 설립된 것은 1935년 5월 나주본당의 첫 본당신부로 고 하롤드 현 대주교가 부임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실제 나주에 천주교 신앙의 씨가 뿌려진 역사는 1866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시작된 병인박해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무학당 인근에 설립된 나주 성당.병인박해의 와중인 1871년 나주에는 천주교 신자 세 분이 잡혀와 모진 고문 끝에 조선군 병영의 정문인 무학당(武學堂) 앞에서 1872년 순교했다는 사실과 그분들에 대한 단편적인 사연들만 교회의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기록물인 "치명일기"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니 참혹한 박해시기에 그보다 더 많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잔혹한 고문을 당하고 장렬하게 순교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수가 정확히 얼마인지 내용은 알 길이 없고 오직 긴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을 뿐이다.
     
    자랑스런 무학당의 세 순교자들의 이름은 강영원(바오로), 유치성(안드레아), 유문보(바오로)이다. 그들이 처형당한 곳으로 알려진 무학당의 원래 터였다고 전해지는 자리는 지금의 나주 초등학교 교정으로 추정되며 그곳에는 무상한 세월의 흐름과 함께 아무런 흔적이 없고 오직 무학당의 주춧돌 12개만이 일렬 종대로 남아있어 역사의 자리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2001년 주춧돌 10개를 나주 본당으로 옮겨와 그 위에 무학당을 상징하는 구조물을 세웠다.
     
    비록 단편적으로 전해진 세 순교자들의 이야기지만 그들의 신앙은 너무나 훌륭하여 오늘날 신앙의 위기를 겪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귀감이 된다. 그들은 참아 견디기 어려운 혹형 속에서도 사람들 앞에서 천주 신앙의 당위성을 용감히 증언했으며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진리를 온 몸으로 입증하였다. 그리고 연일 계속된 혹독한 고문으로 땀과 피가 범벅이 된 지친 몸의 상태에서도 서로 형제애를 발휘하여 세상의 유혹을 극복하자고 격려해 주었으며 조석으로 신공을 통성으로 바친 기도의 삶을 살았다. 모두가 천성이 어질고 착하여 박해를 잘 견디어 내며 옥살이 중에 모범을 보이고 심지어 사형집행일을 남기고 남에게 진 빚을 걱정했던 분들이다.
     
    본당 설립 70주년을 기념하여 성당 구내에 빈무덤 형태로 건립한 나주 무학당 순교자 기념 경당.특히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온갖 고통 가운데서도 오로지 천주님과 천상의 삶만을 너무나 그리워했기에 천신과 성인들이 순교자들을 모시러 오는 꿈을 죽음 직전에 세 분이 함께 꾸기도 했다.
     
    이 점은 다른 순교자들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 특이한 점으로 이 모든 이야기는 세 순교자와 같이 잡혀 옥살이를 하다 석방된 최성화(안드레아)와 서윤경(안드레아)이 1898년 11월 16일 증언하였고, 이 기록이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수록되어 있다.
     
    생각해 보자.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진실되고 더 숭고하고 더 거룩한 삶이 어디에 있겠는가! 참으로 순교자들은 한 분 한 분이 하느님 사랑의 극치를 이룬 분들이다. 예수님을 그대로 닮아버린 분들이다. 그러므로 “순교야말로 선교의 씨앗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자신에게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목숨을 남을 위해 바친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이며 사랑을 실천하는 것보다 더 훌륭한 증거란 없는 것이다. 아, 기막힌 사랑의 봉헌이여! 죽음을 초극한 사랑의 용기여! 도대체 신앙이 무엇이길래 그렇게도 그들은 중요하게 생각했던가! 삶을 바라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거늘. 그러나 우리 무학당의 자랑스런 순교자들은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육정을 끊고 세속의 순간적인 쾌락과 유혹을 기꺼이 버렸던 것이다.
     
    세 순교자들의 이와 같은 위대한 삶을 기억하며 추모하고 고양하기 위해 나주 본당에서는 2004년 본당 70주년을 맞아 무학당의 세 순교자 현양사업을 시작하였고, 그 현양의 장소는 나주 성당 안에 두었다. 무학당 순교 터는 광주대교구의 유일한 순교성지요, 순교정신을 함양하는 일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이다.
     
    나주 초등학교 내에서 발굴된 무학당 주춧돌로 추정되는 돌을 나주 성당으로 옮겨와 만든 순교터 무학당 조형물.이 역사적인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 전 교구민들과 뜻 있는 모든 이들의 나주 무학당 순교성지 조성을 위한 간절한 기도와 물심양면의 협조가 뒤따랐다. 지금으로부터 140여 년 전 이 나라가 어둠과 불신의 늪에 빠져 절망할 때 민족 구원의 제단에 한 목숨 바친 무학당의 위대한 순교자들의 순교정신이 오늘날 민주와 인권의 빛고을을 새롭게 비추는 신앙의 횃불로 거듭나고 있다.
     
    이 불이 참된 선교의 불길로 장렬하게 타올라 이 지역에 그리스도의 진리와 평화를 전하고, 이 지역민들에게 희망의 불기둥이 되어야 주어야 한다. 마침내 순교자들의 후예인 이 시대를 사는 신앙인들의 이런 간절한 기도와 염원은 잊혀질 뻔했던 무학당의 세 순교자들을 복자의 품에 오르게 할 수도 있고 언젠가는 위대한 한국 순교성인의 반열에 들게 하여 신앙의 큰 은총과 영광을 보게 될 날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들이 지금은 꿈과 같이 여겨지겠지만 모든 이들이 같은 꿈을 꾸면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 역사의 진실이므로 우리는 오늘도 그 꿈을 꾼다. [출처 : 나주 무학당 순교성지 홈페이지, 내용 일부 수정(최종수정 2013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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