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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코 수소(1.25)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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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헨리코 수소 (Henry Suso)
성인 기본정보
축일 1월 25일
신분 신부, 신비가
활동지역
활동연도 1295?-1366년

  •    복자 헨리쿠스 수소(Henricus Suso, 또는 헨리코 수소)는 1295년경(또는 1298/1300년경) 3월 21일 독일 남서부 슈바벤(Schwaben)의 콘스탄츠(Konstanz)에서 귀족인 베르크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베르크(Berg)의 하인리히(Heinrich) 백작이고, 어머니는 조이제(Seuse) 가문의 성녀 같은 분이었다. 그래서 그의 실제 이름은 하인리히 폰 베르크(Heinrich von Berg)였으나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라틴어로 ‘수소’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래서 그는 복자 헨리코 수소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그는 13살의 나이에 콘스탄츠의 도미니코 수도회(설교자회, Ordo Fratrum Praedicatorum, OP)에 입회하여 5년 후에 첫 번째 환시를 경험했다. 18살 때 스스로 ‘회심’이라 부른 신비 생활과 신적 사랑을 통해 강한 영적 변화를 체험한 그는 ‘영원하신 지혜와 영적 결혼’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콘스탄츠에서 초기 공부를 마치고 첫 서원 한 후 1322년 쾰른(Koln)의 도미니코회 대학으로 가서 공부를 이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도미니코회의 유명한 신비주의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년)의 가장 뛰어난 제자가 되었다.

       공부를 마치고 콘스탄츠로 돌아와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복자 헨리코 수소는 평생 스승으로 존경하던 에크하르트가 이단으로 의심받아 재판을 받을 때 그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그리고 스승의 가르침을 옹호하기 위해 1327~1329년 사이에 그의 첫 작품인 “진리에 관한 소책자”(Das Buchlein der Wahhrheit)를 썼다. 1329년에 이미 세상을 떠난 에크하르트가 교회로부터 단죄받은 후 그는 수도회 관구 총회에서 견책을 받고 신학 강의를 포기해야 했다. 그래서 그 뒤로는 오직 설교와 영성 지도에만 전념하였다. 바이에른(Bayern)의 루트비히 4세가 교황 요한 22세(Joannes XXII)와 대립했을 때 그는 교황을 옹호했고, 그로 인해 1339년 라인 강변의 디센호펜(Diessenhofen)으로 추방되었다. 하지만 그는 라인강을 따라 스웨덴, 스위스, 프랑스 북동부의 알자스 지방 등에 있는 수많은 수도 공동체를 중심으로 광범위한 영적 · 학문적 활동을 펼쳤다.

       그는 독일어 문학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닐 뿐 아니라 중세 신비신학의 정점을 이루는 영성 작품들을 저술했다. 첫 작품인 “진리에 관한 소책자”를 비롯해 “영원한 지혜에 관한 소책자”(Das Buchlein der ewigen Weisheit)가 가장 유명하다. 이 책은 대화 형식으로 쓰였고,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의 작품으로 알려진 “준주성범”(遵主聖範, Imitatio Christi)과 함께 여러 세기에 걸쳐서 인기를 누린 복자 헨리코 수소의 문학적 · 신비신학적 걸작이다. 그는 자신의 영적 딸인 퇴스(Toss)의 도미니코 수녀원의 엘리사벳 수녀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주요 작품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모범”(Exemplar, 1362년)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그의 모든 작품은 하느님과의 강한 친밀감 속에서 전개되었고, 평생 열렬히 사랑한 ‘영원한 지혜’이신 분의 사랑의 불길을 영혼들 속에 되살리기 위한 노력이었다. 1347년경 콘스탄츠로 돌아온 그는 온갖 중상모략과 박해로 고통을 받았고, 1348년 울름(Ulm)으로 가서 생활하다가 1366년 1월 25일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울름의 도미니코회 성당에 묻혔다.

       1831년 4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Gregorius XVI)는 독일 교회와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오랫동안 공경해온 헨리코 수소에 대한 공경을 승인하면서 그를 복자품에 올렸다. 학자들은 그를 “독일 신비가들 가운데, 아니 어쩌면 모든 신비 저술가들 가운데 가장 사랑스러운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에크하르트보다는 덜 사변적이고 누구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정서에 기초한 내적 생활 방법을 추구했기에 사람들로부터 ‘사랑에 빠진 수사’(Fra Amando)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의 영적인 가르침은 “겸손하고 인내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고 하느님의 모상으로 거듭나기 위해 먼저 모든 피조물로부터 자신을 해방해야 한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 시복식 이후 그의 기념일은 1월 23에 지냈는데, 1월 25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과 중복되었기 때문이다. 도미니코 수도회에서는 3월 2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복자 헨리코 수소가 선종한 날인 1월 25일 목록에 그의 이름을 추가하면서, 독일 슈바벤의 울름에서 수많은 어려움과 질병을 인내하며 견딘 설교자회의 복자 헨리코 수소 신부가 영원하신 지혜에 관한 책을 쓰며 예수님의 감미로운 이름(IHS)을 부지런히 전했다고 기록하였다. 그는 하인리히 조이제/주조(Heinrich Seuse) 또는 핸리 수소(Henry Suso) 등으로도 불린다.♣

참고자료
  • 페르디난트 홀뵉 저, 이숙희 역, 성체의 삶을 위한 성체와 성인들 - '하인리히 쥬제 복자', 서울(성요셉출판사), 2000년, 153-158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0권 - '주조, 하인리히',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4년, 7869-787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