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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포 아콰비바(7.25)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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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루돌포 아콰비바 (Rudolph Aquaviva)
성인 기본정보
축일 7월 25일
신분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550-1583년

  •    복자 루돌푸스 아콰비바(Rudolphus Aquaviva, 또는 루돌포 아콰비바)는 이탈리아 나폴리(Napoli) 왕국 아트리(Atri) 공작의 아들로 1550년 10월 25일 아브루치(Abruzzi)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Aloysius Gonzaga, 6월 21일)와 친척 사이이며 예수회의 제5대 총장인 클라우디우스 아콰비바(Claudius Acquaviva)의 조카로 1568년에 18살의 나이로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로마(Roma)의 예수회 수련원을 거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1578년 초에 포르투갈의 리스본(Lisbon)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동인도 선교를 위해 파견되어 그해 9월 13일에 인도의 고아(Goa)에 도착했다. 복자 루돌포 아콰비바 신부는 매우 단순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로서 하느님을 늘 의식하며 지냈다. 그는 고아의 성 바오로 대학에서 철학 교수로 지내다가 1580년경 아그라(Agra) 근처 무굴 제국의 수도인 파테푸르 시크리(Fatehpur Sikri)의 궁정으로 파견되어 이슬람교도인 아크바르(Akbar) 대제를 개종시키려 노력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1583년 복자 루돌포 아콰비바 신부는 인도 서해안에 있는 살세테(Salcette/Salcete) 지방 선교단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살세테는 고아(Goa) 남쪽 지역으로 주민 대부분이 힌두교 신자이며 그리스도교에 대해 적대적 반감을 품고 있었다. 이곳은 1550년 포르투갈의 영토가 되었고, 1560년에 최초의 선교사들이 파견되었으나 식민당국이 힌두교 사원을 불태우고 신상을 파괴하는 등 강제적 선교 정책을 펴면서 현지인뿐만 아니라 선교사들과도 충돌하였다. 포르투갈 왕실은 우상 숭배를 근절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국가의 의무라고 생각해 강경한 정책을 시행했다. 복자 루돌포 아콰비바 신부는 선교지 내의 모든 마을 돌면서 사람들이 그리스도교에 친숙해지도록 하려고 했다. 그래서 최남단 마을인 쿤콜림(Cuncolim) 마을을 방문하기로 했고, 방문 전날 동료 예수회원인 복자 알폰소 파체코(Alfonsus Pacheco) 신부, 복자 안토니오 프란시스코(Antonius Francisco) 신부, 복자 프란치스코 아라냐(Franciscus Aranha) 수사, 복자 베드로 베르노(Petrus Berno) 신부와 함께 쿤콜림에서 가까운 오를림(Orlim)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즉 1583년 7월 25일 아침 미사를 봉헌하고 미리 주민들에게 방문 사실을 알린 쿤콜림을 향해 출발했다.

       복자 알폰소 파체코는 1549년경 에스파냐 동남부 미나야(Minaya)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1567년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일본 선교를 희망했던 그는 1574년 어렵게 인도 고아의 선교사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1579년 잠시 고국으로 돌아와 활동하다가 1581년 다시 인도로 돌아와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순교하였다. 복자 안토니오 프란시스코는 1550년경 포르투갈의 코임브라(Coimbra)에서 태어나 1671년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1581년에 복자 알폰소 파체코와 함께 인도 선교를 위해 고아에 도착했고, 이듬해 사제품을 받아 활동하다가 순교하였다. 복자 프란치스코 아라냐는 1551년경 포르투갈의 브라가(Braga)에서 부유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578년경 인도 고아 지역을 여행했는데, 당시 그의 삼촌이 고아 지역으로 파견된 첫 번째 주교였다. 그는 1571년 예수회에 평수사로 입회한 후 건축가로서 고아 지역에 여러 개의 성당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1577년 살세테로 파견되어 활동하다가 순교하였다. 복자 베드로 베르노는 1552년경 스위스 남부의 아스코나(Ascona)에서 태어나 1577년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인도 선교를 위해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가서 수련기를 보내고 서원한 후 1579년 인도 고아에 도착했다. 1580년경 사제품을 받고 살세테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순교하였다.

       복자 루돌포 아콰비바와 동료 선교사들이 쿤콜림 마을 외곽에 도착했을 때 원주민 신자들이 마중 나와 마을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다음에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다. 책임자인 복자 루돌포 아콰비바 신부는 일단 돌아가기로 하고, 다음에 성당을 지을 땅만 먼저 찾아본 후 떠나기로 했다. 그리고 적당한 땅을 찾아 임시로 나무 십자가를 세웠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곳은 포르투갈 당국에 의해 철거된 힌두교 사원이 있던 곳이었다. 그들을 몰래 감시하던 마을 주민이 돌아가 알리면서 수백 명의 흥분한 마을 주민이 몰려왔다. 함께 갔던 포르투갈 출신 평신도인 곤살로 로드리게스(Goncalo Rodrigues)가 총을 사용하자고 했으나 선교사들은 무기 사용을 반대했다. 그리고 무장한 주민들 앞으로 나아가 복자 루돌포 아콰비바 신부가 먼저 살해되어 순교하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주민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하느님께 자신의 영혼을 바쳤다. 이어서 다른 네 명의 예수회 선교사가 순교하고 그들과 함께 왔던 많은 원주민 신자도 죽거나 다쳤다. 순교자들의 시신은 우물 속으로 던져졌고, 며칠 후 시신을 수습해 라콜(Rachol)의 선교부로 옮겨 매장하였다. 그 뒤로 순교자들의 유해는 여러 곳으로 보내져 공경을 받았다.

       이날 모두 다섯 명의 예수회 신부와 원주민 신자 14명 그리고 포르투갈 출신 신자 1명이 사망하였다. 1600년 고아의 대주교가 시복 절차를 시작하면서 이들 중에서 5명의 예수회 신부들 명단만 기록하였다. 나머지 평신도들의 이름이 빠진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섯 명의 순교자들은 1893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 루돌포 아콰비바와 네 명의 동료 순교자’라는 이름으로 복자품에 올랐다. 그들의 기념일은 순교한 날인 7월 25일에 지내는데, 이전에는 7월 27일에 기념하기도 했다. 예수회에서는 2월 4일에 그들을 기념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7월 25일 목록에 인도의 살세테에서 복된 순교자 루돌포 아콰비바와 알폰소 파체코 · 베드로 베르나 · 안토니오 프란시스코 신부 그리고 프란치스코 아라냐 수사가 십자가를 높였다는 이유로 이교도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기록하며 그들의 이름을 추가하였다. 그들은 보통 ‘살세테의 순교자들’(Salcette Martyrs) 또는 ‘쿤콜림의 순교자들’(Cuncolim Martyrs)로 불린다.♣

참고자료
  • 조지프 틸렌다 저, 박병훈 편, 예수회 성인들 - 예수회 고유미사에서 기념하는 성인과 복자의 약전, 서울(도서출판 이냐시오영성연구소), 2014년, 47-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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