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한 박해의 상황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고 그에 대한 대책을 건의했던 ‘백서(帛書)’의 주인공인 황사영의 묘는 지난 1980년에 들어서야 겨우 그 위치가 확인됐다. 양박청래(洋舶請來)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능지처참 형을 받은 그의 시신이 온전할 리도 없거니와 가까운 집안사람들도 모두 유배를 당한 터라 시신을 거둘 사람조차 없었다. 다행히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황씨 문중 선산에 안장한 이들 덕택에 순교자의 유해가 전해질 수 있었다.
그 후 집안에서조차 잊혀 왔던 황사영의 묘는 180년이 지난 1980년 황씨 집안의 후손이 족보 등 사료를 검토하고 사계의 고증을 받아 홍복산 선영에서 황사영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발견하고, 이를 발굴한 결과 석제 십자가 및 비단 띠가 들어 있는 항아리가 나오면서 무덤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렵게 찾은 황사영의 묘는 현재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속칭 가마골에 있지만, 아직 변변하게 순교사적지로 개발되지 못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건물 뒤에 가려져 있다. 첫 발굴 당시 황사영 순교자의 묘를 확인한 후 추후 교회법적 절차에 따라 발굴하고자 더 이상 진행하지 않고 현재의 묘를 조성하였다.
하지만 그가 북경에 보내려 한 백서가 귀중한 교회사적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순교에 이르기까지 그가 보여 준 굳건한 신앙은 오늘날 우리에게 신앙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황사영 순교자는 현재 시복 절차가 진행 중이어서, 시복과 도로 확장 공사 상황 등에 맞추어 최종 발굴을 준비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그의 묘가 하루속히 사적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황사영은 초기 교회의 지도자급 신자 중의 하나로서 창원 황(黃)씨이며 남인(南人)의 명문거족 출신이다. 부친 황석범(黃錫範)과 모친 이씨(李氏) 사이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1790년(정조 14년) 16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다. 그의 됨됨이와 재주를 높이 산 정조 임금은 친히 그의 손을 어루만지며 격려했고, 당시 풍속에 따라 그는 국왕이 만진 손목을 명주(토시)로 감고 다녔다고 한다.
명문의 배경과 출중한 재주로 탄탄한 출세의 길을 앞둔 청년 황사영은 학문의 길을 위해 찾아간 정약종의 문하에서 일생일대의 변화를 겪었다. 과거에 급제한 후 그는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장녀 명련(命連)과 혼사를 치렀고, 천주교인으로 명도회(明道會) 회장이던 정약종은 황사영의 빼어난 재능에 반해 장차 교회의 큰 일꾼으로 삼을 것을 다짐했다.
진사시에 합격한 이듬해인 1791년 그는 이승훈에게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는 한편 정약종, 홍낙민 등과 함께 천주학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누었다. 결국 천주학의 오묘한 이치에 매료된 그는 알렉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그는 부귀공명이 기다리는 벼슬길을 마다하고 죽음의 길로써 진리를 찾는 고통스러운 일생을 선택했다. 그는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직후인 1795년 주 신부를 최인길의 집에서 만난 이래 측근으로 주 신부를 봉행(奉行)하며 명도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발한 전교와 신앙생활을 했다.
1801년 신유박해는 수많은 교우들을 희생시켰고 정약종 등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됐다. 역시 체포령이 내려진 황사영은 박해의 손길을 피해 서울을 빠져나와 탐스럽고 아름답던 수염을 깎고 상복으로 갈아입고서 충청북도 제천의 배론으로 숨어들었다.
황사영은 배론의 옹기가마 토굴에 숨어 지내며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과 김한빈, 황심 등으로부터 수시로 전해지는 바깥의 박해 상황에 대해 기록하던 중, 그해 8월 주문모 신부의 치명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낙심과 의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가는 모필로 명주 천에 적었다. 옷 속에 이 비밀문서를 품고 가던 황심이 붙잡힘으로써 백서는 북경 주교에게 전해지지 못한 채 사전에 발각되고 황사영은 9월 29일 체포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이 백서 사건은 조야(朝野)를 발칵 뒤집어 놓았으며, 그는 나라를 팔아넘기려는 대역 죄인의 오명을 쓰고 11월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이 사건으로 홀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은 제주도로, 외아들 경헌(敬憲)은 추자도로 각각 유배되고, 가산은 모두 몰수당해 한때 명문 세도가였던 가문은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여파는 16명의 또 다른 순교자들을 탄생케 했다.
귀중한 교회사적 자료인 이 백서는 가로 62센티미터, 세로 38센티미터의 흰 명주 천에 작은 붓글씨로 쓰였고 모두 1백 22행, 1만 3천 3백 11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되어 있다. 백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서, 첫째는 신유박해 중 순교한 주 신부 외 30여 명의 빛나는 사적을 열거하고, 둘째는 박해의 동기와 원인이 벽파와 시파 간의 골육상잔(骨肉相殘)의 당쟁이었음을 피력하고, 세 번째로는 조선 교회의 회생과 교우들의 학살에 대한 대비책으로 외세에 원조를 청하는 내용이다.
황사영 백서의 원본은 원래 근 1백 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숨겨져 있다가 1894년에 오래된 문서를 정리하면서 우연히 발견돼 마침내 뮈텔 주교에게 보내졌고, 뮈텔 주교는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이를 교황 비오 11세에게 기념품으로 봉정했다. 현재 백서는 바티칸 박물관 내 선교민속 박물관에 소장 · 전시되어 있다.
오랫동안 교회 내에서 황사영의 세례명이 알렉산델(亞肋山)로 알려져 왔으나 1990년대 말 여러 사료를 연구한 결과 알렉시오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황사영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사학징의(邪學懲義)”는 그의 세례명을 ‘알렉시오(亞肋叔)’로 표기하고 있다. 김대건 신부가 1845년에 작성한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대한 보고서’에도 그의 세례명을 ‘Alexis’ 또는 ‘Alexius’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처럼 황사영의 세례명이 잘못 알려지게 된 것은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에 ‘알렉산델’로 잘못 적힌 것을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그대로 표기한 데 원인이 있다.
한편 황사영 순교자의 18대 종손 황세환 요셉 씨는 2004년 4월 6일 한국교회사연구소에 황사영의 토시가 든 청화백자합을 기증했다. 이 청화백자합은 지난 1980년 8월 31일-9월 1일 가마골에서 황사영의 묘를 발굴할 때 출토된 것으로 그간 창원 황씨 판윤공파 종중에서 보존해오다 이날 연구소에 영구 기증됐다.
황사영은 죽을 때까지 손목을 명주(토시)로 감고 다녔고, 그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자 시신을 옮긴 후손들이 이 토시를 합 속에 넣어 보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출토 당시 돌 십자가와 함께 180여 년간 지하에 묻혀 있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마멸된 토시는 까맣게 응고된 형태로 남아 원래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그 후 보존 처리를 거쳐 2009년 9월 5일 절두산 순교성지 박물관에서 토시가 담긴 청화백자합이 최초로 전시되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의정부교구는 의정부 주교좌성당에서 출발해 사패산을 넘어 남종삼 성인 묘역과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까지 순례하는 '순교자의 길'을 개발해 송추 성당을 중심으로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순례와 미사를 봉헌하고, 2018년 8월 24일자 공문을 통해 송추 성당을 남종삼 요한 성인과 가족 순교자 묘소와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순례지로 지정했었다. 또한 묘소 입구의 건물을 매입하고 마당에 대형 십자가를 세우고 성모자상을 설치하여 순례자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2024년 8월 30일자 인사발령을 통해 황사영순교순례지 담당 신부를 발령한 후 기존에 매입한 건물 1층에 성당을 마련해 평일과 주일에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24년 12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