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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 용산 성심 신학교(옛 용산 신학교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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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기본정보
간략설명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셨던 최초의 근대식 신학교 성당
지번주소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4가 1-1 
도로주소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19길 49
전화번호 (02)701-5501
팩스번호 (02)717-3877
홈페이지 http://www.songsim.org
관련기관 성심 수녀회    
관련주소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4가 1(성심 여고 내)
문화정보 사적 제255호(성당과 신학교 교사)
  • 성심여고 교정의 예수성심상.지금은 성심 여고 교정 안에 속하게 된 용산 성심 신학교(옛 용산 신학교 성심 성당)와 성심 수녀회 관구 사무실과 성심 기념관으로 쓰고 있는 옛 용한 신학교 건물은 성소의 못자리였던 당시의 자취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4가에 위치한 옛 용산 신학교 성당은 1902년에 축성된 건물이다. 여기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첫 방인 사제였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가 축성 당시부터 1958년까지 모셔져 있었고 조선 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소 브뤼기에르 주교와 제8대 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의 유해가 거쳐 갔던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는 1855년 충청도 배론에 세워진 신학당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그 이전의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위한 노력은 이미 1830년대부터 시작되어 정하상에게 신학 교육을 시킨 바 있고 1836년에는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를 마카오에서 신학교육을 받게 했다.
     
    배론 신학교는 1866년 병인박해로 폐교됐지만 신앙의 자유가 확보됨에 따라 1882년 21명을 페낭 신학교에 유학생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1885년에는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범골에 예수 성심 신학교가 문을 열고, 1887년에는 바로 이곳 서울 용산으로 이전한다. 1892년에는 신학교 교사를 신축했고, 성당은 그 10년 후인 1902년에 신학교 부속 성당으로 건립되어 축성되었다. 용산 신학교 성당은 1982년 교사와 함께 사적 제255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그 후 1914년 성 유스티노 신학교, 1927년에는 함경남도 덕원 신학교 등 여러 군데의 신학교가 생겨났고 서울, 대구, 광주, 부산, 수원, 대전에 이어 1996년에는 인천 가톨릭 대학이 개교하기에 이르렀다.
     
    옛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 모습. 현재는 성심 기념관으로 수녀회 사무실 등으로 이용하고 있다.옛 용산 신학교 성당에 그 유해가 모셔져 있었던 조선 교구 초대 교구장 소 브뤼기에르 주교는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으로 1831년 조선 교구가 북경에서 독립하면서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그는 갖은 고난과 질병을 이겨 내고 조선 땅으로 입국을 시도하다가 결국은 조선 땅을 눈앞에 두고 조선을 향해 떠난 지 4년 만에 4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비록 그는 조선에 입국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개척해 둔 입국 경로를 따라 곧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조선에 들어옴으로써 한국 교회는 완전하게 조직을 갖춘 명실상부한 교회가 된 것이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의 조선 교구 제8대 교구장 뮈텔 대주교는 1877년 한국에 입국해 1933년 서울에서 선종할 때까지 중간의 몇 년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이국땅인 한국에서 사목 활동을 했다.
     
    박해 시대에 활동한 적이 있는 뮈텔 주교는 한불 조약 이후 지하 교회에서 해방된 교회의 모습을 좀 더 확고히 하기 위해 예수 성심 신학교, 종현 성당, 약현 성당을 짓는 한편 각 지방에서의 본당 창설에 많은 지원을 했다.

    옛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 성당 외부 모습.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순교자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한 순교자 현양과 한국 천주교회사의 정립 그리고 순교복자의 시복 등으로 꼽을 수 있다. 유명한 뮈텔 일기는 자신이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된 1890년 8월 4일부터 임종하기 직전인 1932년 12월 31일까지 써 둔 일기로 총 6천여 면의 분량에 주교 개인 사정과 재임 동안의 교회 사정을 기록한 것인데 우리 한국 교회로서는 아주 귀중한 자료이다.
     
    그 외에도 그는 "뮈텔 문서", "기해 일기" 등을 저술하고 황사영 백서의 원본이 발견되자 이를 프랑스어로 번역해 학계에 배포하고 그 원본을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교황 비오 11세에게 봉정했다. 현재 황사영 백서는 바티칸 박물관 내 선교민속 박물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다.
     
    옛 용산 신학교 성당은 많은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치되었던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조선교구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2대 교구장 성 앵베르 주교, 3대 페레올 주교, 4대 성 베르뇌 주교, 5대 성 다블뤼 주교, 6대 리델 주교, 7대 블랑 주교, 8대 교구장이자 이 성당 봉헌식을 집전한 뮈텔 주교에 이르기까지 8명의 역대 조선 교구장 주교들의 유해가 모두 이 성당에 안치되었었고, 기해박해 순교자인 성 모방, 성 샤스탕 신부를 비롯해 배론 신학당을 세우고 병인박해 때 순교한 오메트르 신부, 성 위앵, 성 브르트니에르, 성 도리, 성 볼리외 신부 등의 유해도 이 성당을 거쳤다. 이곳에 안치되었던 순교자들의 유해는 그 후 혜화동 신학교 성당을 비롯해 명동 주교좌성당, 절두산 순교성지 등지로 옮겨 모셨고, 역대 교구장들의 유해는 용산 성직자 묘지로 옮겨 안장했다. 2010년 노후화된 성당 외벽과 주변에 대한 보수공사를 시행하고, 2011년에는 성당 내부에 대한 보수공사를 진행중이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20년 2월 19일)]

     
     
    축성 100돌 맞은 서울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 성당
     
    옛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 외부 모습.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의 전신인 서울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1887년 3월 설립)내 성당이 2002년 4월 14일로 봉헌 100주년을 맞았다. 현재 성심 여고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성당은 1902년 4월 14일 봉헌된 후 일제의 탄압으로 1942년 예수 성심 신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40년간 사제양성 교육을 받던 신학생들이 하느님과 가장 긴밀하게 만났던 성소로 사랑을 받았다.
     
    지금은 신자들과 세인들의 기억에서 잊혀졌지만 당시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는 서울 종현 성당(현 명동 성당)과 약현 성당(현 중림동약현 성당)과 함께 ‘천주교 신앙 자유’의 대표적 상징이었다. 특히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비롯한 한국 천주교회 성직자 출신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치하면서 한국인 사제 양성의 요람을 상징하는 으뜸 장소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는 1855년 충청도 배론(현 배론 성지)에 세워진 배론 신학당이다. 당시 배론에서 지내던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가 1855년에 사망하면서 임시 교구장 서리직을 맡고 있던 메스트르 신부가 배론에 한국인 사제 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배론 신학당은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폐쇄됐고, 1885년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엉골(부흥골 또는 범골이라고도 함)에서 예수 성심 신학교가 문을 열었다. 예수 성심 신학교는 2년 후인 1887년 서울 용산 원효로 4가의 현 위치로 이전했으며, 1892년에는 신학교 교사를 신축했다. 용산 신학교 성당은 그 10년 후인 1902년에 신학교 부속 성당으로 세워졌다.
     
    옛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 모습(현 성심 기념관).뮈텔 주교의 일기에 따르면, 성당 봉헌식이 있던 1902년 4월 14일은 화창한 봄날이었다. 봉헌 예식은 9시에 시작돼 낮 12시 40분에 끝났고, 이어서 뮈텔 주교가 주례한 장엄 미사가 오후 1시 30분까지 계속됐다고 한다.
     
    이후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 성당은 1942년 일제의 탄압에 의해 신학교가 폐쇄될 때까지 미래의 사제인 신학생들의 기도와 성사 생활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용산 신학교에서 배출된 100명이 넘는 사제 중 성당이 세워지기 이전에 사제품을 받는 10여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이 성당에서 공동체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기도와 미사를 통해 사제 성소를 키웠다.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 성당은 한국인 사제 양성의 요람지 성당에 걸맞게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교구장 주교들과 순교 성직자들의 유해를 모셨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조선교구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2대 교구장 성 앵베르 주교, 3대 페레올 주교, 4대 성 베르뇌 주교,  5대 성 다블뤼 주교, 6대 리델 주교, 7대 블랑 주교, 8대 교구장이자 이 성당 봉헌식을 집전한 뮈텔 주교에 이르기까지 8명의 역대 조선교구장 주교들의 유해가 모두 이 성당에 안치됐었다. 또 기해박해 순교자들인 성 모방, 성 샤스탕 신부를 비롯해 배론 신학당을 세우고 병인박해 때 순교한 오메트르 신부, 성 위앵, 성 브르트니에르, 성 도리, 성 볼리외 신부 등의 유해도 이 성당을 거쳤다.
     
    김대건 신부를 위시해 이곳에 안장됐던 한국 교회의 순교 성직자 10위가 모두 지난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때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으니  용산 신학교 성당은 참으로 축복받은 성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옛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 성당 뒷마당의 성모자상.그러나 이곳에 안치됐던 순교 성인들의 유해는 그 후 혜화동 가톨릭대 성신교정 성당을 비롯해 명동 성당 지하 소성당, 절두산 등지로 이양돼 안치됐고, 그밖의 역대 교구장 주교들의 유해는 용산 성직자 묘역에 안장됐다.
     
    종현 성당과 약현 성당을 설계한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코스트 신부가 설계한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 성당은 1899년에 착공해 3년 만에 완공됐다. 신학교 부속 성당으로서의 기능을 살리기 위해 이 성당은 교구의 일반 성당과는 상당히 다르게 설계됐다.
     
    성당 내부의 천장 구성과 장식은 성당 내부의 천장 구성과 장식은 고딕양식에 가깝지만 성당 정면 입구에 종탑이 없고, 출입구는 제대 쪽 양측 면에 나 있고, 제의실이 제대 반대쪽 입구에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 제의실 위 2층에는 성가대석이 설치돼 있으며, 신자석 바닥도 제대를 향해서가 아니라 중앙축의 좌우에서 원형극장 형식으로 단이 지어져 있었다.
     
    이 성당은 또 언덕 경사지에 지어진 관계로, 언덕 아래에 있는 앞면 일부는 3층으로, 언덕 위인 뒤에서는 1층으로 돼 있다. 그래서 작은 건물이지만 당당한 외관을 보여주고 있다. 성당은 신학교 교사와 함께 지난 1982년 사적 제255호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양업교회사연구소 연구소장 차기진(루가) 박사는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는 세 번째 한국인 사제인 강도영 신부를 비롯해 105명의 한국인 사제를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며, 신학교 부속 성당은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박해시대 순교 성직자들과 1~8대 조선교구장들의 유해가 모셔졌던 성지로서 한국 천주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라고 평가했다.
     
    차 박사는 따라서 “비록 현재 성심 여고 교정으로 바뀌었지만 매년 4월 14일에 순교자 유해 안치식 재현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해 이곳 성당에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게 하는 사목적 배려가 요청된다”고 제안했다. [평화신문, 2002년 4월 14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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