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소속 본당(순례지).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57(가회동 30-3) 소재. 1949년 9월 명동 본당에서 분리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 주보는 선교의 수호자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였으나, 2014년 124위 시복식을 계기로 복자 주문모(周文謨) 야고보와 복녀 강완숙(姜完淑) 골롬바를 공동 주보로 정해 2018년 3월 30일 교구장의 승인을 받았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으면서 명동 본당의 공소였던 가회동 구역(광화문 네거리에서 동으로 종로3가, 권농동을 돌아 북으로 삼청동에 걸치는 북촌 19동)에 새로운 본당 설립 계획이 세워졌다. 당시 이 구역을 맡고 있던 임병팔(林秉八) 회장을 중심으로 방 하나를 얻어 공동체 모임을 하다가 현 본당 터에 살고 있던 전길헌(全吉憲) 마리아가 1949년 4월 자신이 살던 땅을 증여하면서 첫 본당 부지가 확보되었다. 같은 해 6월 명동 본당의 장금구(莊金龜) 요한 금구 주임신부가 첫 미사를 봉헌한 후, 교구의 결정에 따라 9월 하순 본당 설립이 이루어졌다. 당시 본당의 신자 수는 40여 명으로 전 가족이 신자인 가정은 5세대이고, 외짝 교우 세대를 합쳐 30세대 정도에 불과했다.
초대 주임으로 임명된 윤형중(尹亨重) 마태오 신부는 거처가 없어 명동에서 통근하며 미사를 집전하고 본당을 운영했고, 뒤이어 한국순교복자수녀회를 창립한 방유룡(方有龍) 레오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했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여 신자들이 흩어지고 본당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성당으로 사용하던 한옥은 전쟁 중 인민일보 사옥으로 전용되었고, 인민군이 철수한 다음에는 재사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초토화된 상태였다. 전쟁이 끝난 후 황해도 사리원에서 남하한 박우철(朴遇哲) 바오로 신부가 제3대 주임으로 부임하고, 당시 보좌였던 백민관(白敏寬) 테오도로 신부가 미8군을 통해 주한미군민간원조단(AFAK)의 원조를 받아 성당 신축공사를 시작했다. 연건평 134평의 3층 시멘트 블록 건물로 신축된 성당을 준공하고, 1954년 12월 3일 본당 주보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대축일에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대주교 집전으로 축성 미사를 봉헌했다.
성당 신축으로 안정된 신앙생활을 하게 된 신자들은 이후 주일학교를 개설하고 신심 단체를 설립해 나갔다. 1968년 제8대 최익철(崔益喆) 베네딕토 신부 재임기에 사제관을 준공하고, 이듬해에 유치원을 개원하고,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에 본당 묘지를 마련했다. 제9대 최석우(崔奭祐) 안드레아 신부 재임기인 1970년에 성당 지붕을 교체하고 외벽에 화강암을 붙이는 대대적 수리를 하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를 초청해 수녀원 분원을 마련했다. 제13대 김형식(金亨植) 베드로 신부 재임기인 1984년에는 원아 감소로 유치원을 폐쇄하고,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분원을 설치했다. 제15대 소원석(邵元碩) 가브리엘 신부가 성당 진입로 대지를 매입해 현 성당 부지를 확정한 후, 1999년 4월 제16대 이문주(李文柱) 프란치스코 신부가 부임해 사무실 겸 교육관 건물을 준공하고 11월에 본당 설립 5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제17대 최승정(崔昇晶) 베네딕토 신부는 2006년 4월 노후화된 성당 구조물에 대한 정밀안전진단 용역을 실시해 안전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받고 재건축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2010년 2월 제18대 주임으로 부임한 송차선(宋次善) 세례자 요한 신부는 성당 재건축을 추진해 2013년 11월 21일 새 성당을 준공했다. 새 성당은 한국에서 첫 미사가 봉헌된 사적지로서의 위상을 반영하면서 북촌한옥마을에 어울리는 독특한 외관으로 건립되었다. 마치 한복을 차려입은 선비(한옥)와 외국인 사제(양옥)가 어깨동무하는 듯 정겨우면서도 독특한 외관을 자랑한다. 2014년 4월 20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염수정(廉洙政) 안드레아 추기경 집전으로 새 성당 봉헌미사를 거행했다.
가회동 성당이 위치한 북촌 일대는 최초의 선교사인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밀입국해 1795년 4월 5일 부활 대축일에 복자 최인길(崔仁吉) 마티아의 집에서 조선에서의 ‘첫 미사’를 집전한 곳이다. 그리고 본당 관할구역 또한 주문모 신부가 복녀 강완숙 골롬바의 집에 숨어 지내면서 사목활동을 펼쳤던 지역으로 한국 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국천주교회는 전 세계에서 유례없이 사제와 수도자를 포함한 선교사 없이 자생한 유일한 교회이다. 쇄국 정책이 한창이던 18세기 후반, 조선의 지식인들은 스스로 중국에서 천주교 서적을 구해 연구하면서 교회의 가르침을 진리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가성직제도까지 시행했으나, 교리 지식이 쌓이면서 가성직제도에 대한 의문이 생겨 북경교구청에 자문을 구했다. 북경 주교는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인 조선 신자들의 소식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교황청에 이 기쁜 소식을 전하며 성사 집전을 위해 성직자를 파견할 것을 결정했다. 당시 쇄국 정책 때문에 서양인 사제를 보내기 어려워 한국 사람과 외모가 비슷한 중국인 사제 주문모 신부를 파견하기로 했다. 마침내 복자 최인길 마티아 · 윤유일(尹有一) 바오로 · 지황(池璜) 사바 등은 1794년 12월 압록강이 얼 때를 기다려 주문모 신부를 밀입국시키는 데 성공했다.
한양에 도착한 주문모 신부는 계동(현 서울 종로구 계동 지역)에 있는 역관(통역관) 최인길의 집에 머물면서 한글을 배웠으며, 1795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는 신자들과 함께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그의 입국 사실이 탄로 나자, 그는 부랴부랴 여회장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반면에 주문모 신부의 입국을 도운 조선교회의 밀사 윤유일과 지황, 그리고 집주인 최인길 등은 그날로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다가 모두 순교하고 말았다. 이로써 첫 천주교 박해인 을묘박해가 시작되었다.
수배 중인 주문모 신부는 초대 여회장인 강완숙의 집(가회동 본당 관할 지역)에 피신해 비밀리에 성무를 집행했다. 당시 혼자 사는 여인의 집에 외간남자가 같이 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문모 신부는 이곳저곳으로 다니면서 성사를 베풀었고, 신자들의 교리 공부와 전교 활동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하고 교리서도 집필했다. 이처럼 그가 활동한 지 6년이 지나면서 조선 교회의 신자 수는 모두 1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가 모든 것을 앗아 가고 말았다. 박해가 일어나자 연이어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자백하도록 강요를 받거나 죽임을 당했다. 이때 주문모 신부는 자기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귀국을 결심했다가, ‘나의 양 떼와 운명을 같이하여 순교함으로써, 모든 불행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자수를 결심했다. 그리고 1801년 5월 31일(음력 4월 19일) 한강 근처 새남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그 후로도 황실에서 주도하는 모진 박해가 계속되면서 무수한 순교자들이 탄생했다. 박해를 주도했던 황실은 천주교를 사악한 종교(사교)로 여기고 그 씨를 말리고자 했다. 이렇게 순교자들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패배자의 모습으로 죽어갔고, 황실은 승리자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박해가 끝나고 마지막 황실의 주역들이 모두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마침내 신앙이 승리했음이 입증되었다. 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친왕은 ‘비오’, 왕비는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가회동 본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가회동 본당에 보관되어있던 옛 세례 문서를 본당 사무장(김상규)이 찾아냈는데, 의친왕의 이름이 ‘이강’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미 왕조가 끝났기에 ‘왕’이라는 호칭 대신에 ‘공’(公)을 사용했다. 그리고 의친왕이 선종할 당시 신문기사에서 그가 세례받은 동기를 알 수 있다.
고종황제 둘째 아드님인 이강(李堈) 의친왕(義親王)은 8월 16일 안국동 175번지 별장에서 불우한 평생을 마치었다. 풍문여고 교사(校舍) 뒷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는 고풍스러운 별궁에서 파란 많은 일흔아홉 해의 생애를 끝마친 것이다. 한국에 살아남아 있는 이 왕가(李 王家)로서는 오직 한 분인 의친왕이 서거한 날 아침 이렇다 할 조객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가족들과 천주교 신자들의 망자를 위한 연도의 소리만이 구슬프게 들려왔다. 영전(靈前) 앞에 모신 사진을 확대 복사하는 데도 당황해야 하는 가운(家運)이기도 했다. 섬돌 밑이 도는 낡은 마루 위에 가마니가 깔려있고 그 앞에 시체가 놓여 있었다. 시포(屍布) 앞에 조그마한 상이 마련되어 있고 상위에는 가톨릭 식대로 십자가와 촛불이 안치되어 있었다. 말없이 누워있는 의친왕 앞에서는 8인의 천주교 신자들이 “주는 탕자(蕩子) 비오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면서 기도를 할 뿐 12시까지 별반 손님도 보이지 않았다. (중략)
그는 눈을 감기 1주일 전에 가톨릭에 귀의하였다. 그는 천주교 신부를 청해 영세받기를 원했다. 그는 입교 동기로서 자기의 선조(先祖)가 천주교를 탄압하여 조선 최근사(最近史)를 피로 물들인 점을 자손의 한 사람으로 속죄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무자비하게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을 처단했어도 웃음으로 목숨을 내놓았고 그 후 날로 천주교 세력은 번성해가는 것은 ‘진리’였기 때문이란 점을 들었다 하는데 그가 죽기 이틀 전인 15일에는 의친왕 비(妃) 김숙(金淑, 77세) 여사도 시내 가회동(嘉會洞) 성당에서 ‘마리아’란 영명(領名)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의친왕의 영결 미사는 20일 오전 10시 명동 천주교성당에서 거행되었다. <京鄕新聞, 1955년 8월 18일>
이러한 순교 역사를 기억하고 죽음으로써 신앙의 진리를 지켜낸 선조들을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가회동 본당은 새 성당을 신축하면서 1층 내부에 상설 역사전시실을 마련했다. 전시실에는 한국교회 첫 부활 대축일 미사 봉헌과 조선의 마지막 왕족의 세례 사실에 관한 역사적 배경을 각종 유물과 사료 전시를 통해 알리고 있다. 이로써 북촌에 위치해 이곳을 찾는 많은 외국인과 관광객, 지역 주민을 위한 선교 본당으로서뿐 아니라 순교 선조들의 정신을 느끼고 배울 수 있는 순례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가회동 성당 홈페이지 내용을 중심으로 편집(최종수정 2020년 2월 19일)]
※ 교황청 승인 국제순례지 ‘천주교 서울 순례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