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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릴로(2.14)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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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치릴로 (Cyril)
성인 기본정보
축일 2월 14일
신분 수도자, 선교사
활동지역
활동연도 826/827-869년

  •    성 키릴루스(Cyrillus, 또는 치릴로)와 그의 형인 성 메토디우스(Methodius)는 그리스의 테살로니카(Thessalonica)에서 고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무역항이었던 테살로니카에는 슬라브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훌륭한 학교도 많았다. 이런 환경으로 인해 성 키릴루스와 성 메토디우스는 어려서부터 슬라브 민족의 언어와 풍습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성 키릴루스는 14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가서 막강한 권력을 지닌 후견인의 도움으로 왕립 대학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성 포티우스(Photius, 2월 6일)의 문하생으로 공부하다가 그의 형 성 메토디우스처럼 슬라브어를 사용하는 지방의 총독직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하고 사제품을 받은 후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그는 곧 스승인 성 포티우스를 능가하는 교수가 되었다. 858년에는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혼란을 피해 6개월 동안 보스포루스(Bosporus)의 수도원에서 지낸 후 철학 교수로 복귀하였다. 그 후 성 키릴루스를 도와주던 후견인이 암살되자 비티니아(Bithynia)에 있는 올림푸스 산의 수도원에서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 그곳에는 이미 옵시키온(Opsikion) 지방의 슬라브 식민지 가운데 한 지역의 총독으로 오랫동안 지내다가 사직하고 돌아온 성 메토디우스가 은수자로 생활하고 있었다.

       858년 성 키릴루스와 성 메토디우스 형제가 보스포루스 수도원에 머물고 있을 때, 동로마 제국의 황제 미카엘 3세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된 성 포티우스가 제자인 성 키릴루스에게 러시아의 드네프르강(Dnieper)과 볼가강(Volga) 변에 사는 하자르족(Khazars)에 대한 선교를 맡겼다. 성 키릴루스는 형인 성 메토디우스와 함께 하자르족 선교를 위해 출발했고,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 먼저 하자르어를 익혀 수많은 개종자를 얻는 성과를 거두었다. 전설적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이 선교 여행 중 헤르손(Kherson) 지역에 머물 때 크림(Krym) 반도로 귀양을 갔다가 순교한 교황 성 클레멘스 1세(Clemens I, 11월 23일)의 유해를 발견했다고 한다. 선교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성 키릴루스는 그 후 얼마간 교황청립 대학의 교수로 재직했고, 성 메토디우스는 소아시아 헬레스폰트(Hellespont)의 폴리크로니온(Polychronion)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863년에는 모라비아(Moravia) 왕국의 왕 로스티슬라프(Rostislav)의 요청에 따라 미카엘 3세 황제와 성 포티우스 총대주교는 다시금 성 키릴루스와 성 메토디우스를 모라비아인들의 개종을 위해 파견하였다. 당시 모라비아의 왕은 프랑크 왕국의 지배로부터 정치적 독립과 종교적 자율권을 얻기 위해 황제의 도움을 청하며 슬라브어를 아는 선교사를 요청했다. 비록 그들을 개종시키는 일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성 키릴루스와 성 메토디우스의 슬라브어 실력은 대단했었다. 성 키릴루스는 선교를 위해 성경을 고대 슬라브어(고대 불가리아어)로 번역하고, 그리스 문자에 기초하여 슬라브 알파벳을 만들었다. 최종 확정된 키릴 문자(Cyrillic script/alphabet)는 아직도 현대 러시아어와 많은 다른 슬라브 언어의 알파벳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성 키릴루스는 성 메토디우스의 도움으로 복음서와 시편, 바오로 서간을 슬라브어로 번역하였고, 여러 전례서를 슬라브어로 번역해 전례를 거행하였다.

       그런데 성 키릴루스와 성 메토디우스의 이러한 활동은 라틴 교회, 특히 독일 교회 성직자들의 원성을 샀다. 당시 라틴 교회는 전례에서 라틴어 외에 다른 언어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었다. 라틴어만 사용하던 서방교회에서 볼 때, 전례에서 슬라브어를 사용하고 콘스탄티노플에서 온 그들의 출신 때문에 혹시 동방교회의 이단 중 하나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기도 했다. 결국 잘츠부르크(Salzburg)와 파사우(Passau)의 주교가 라틴 전례 거행을 강하게 요구했고, 이를 계기로 교황 성 니콜라우스 1세(Nicolaus I, 11월 13일)가 867년에 성 키릴루스와 성 메토디우스를 로마로 소환했다. 그런데 그들이 로마로 가던 도중 교황이 선종했고, 후임 교황으로 선출된 하드리아누스 2세(Hadrianus II)는 두 형제의 방문에 매우 호의적이었다. 성 키릴루스와 성 메토디우스는 자신들이 발견한 교황 성 클레멘스 1세의 유해를 교황에게 인도하고, 슬라브어 사용에 대한 자기들의 의견 또한 충분히 설명하였다. 이에 교황은 그들의 뜻을 받아들여 전례에서 슬라브어를 사용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다.

       그들이 로마에 머무는 동안 성 키릴루스는 수도자가 되어 수도원에 머물렀고, 그 이름 또한 널리 알려졌으나 건강이 악화하여 모라비아로 돌아가지 못하고 869년 2월 14일 수도원에서 선종하여 로마의 성 클레멘스 대성전에 안치되었다. 동생이 선종한 후 성 메토디우스는 교황 특사 자격으로 모라비아의 슬라브족에게 돌아갔다. 하드리아누스 2세 교황은 판노니아(Pannonia)를 독일 교계제도에서 독립시켜 모라비아의 교계제도에 넣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였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 메토디우스를 판노니아 지역에 특사로 파견하였다. 그리고 그를 판노니아와 모라비아 지방 전체를 관할하는 시르미움(Sirmium)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일부 지역이 독일 주교들의 관할권에서 벗어나자 870년에 독일의 루트비히 2세 왕과 독일 주교들은 라티스본(Ratisbon, 오늘날의 레겐스부르크)에서 시노드를 열어 성 메토디우스를 추방하기로 하였다. 성 메토디우스는 3년간 스바비아(Swabia)에서 귀양 생활을 하다가 873년 교황 요한 8세(Joannes VIII)의 중재로 자유의 몸이 되어 자기 교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요한 8세 교황은 슬라브 지역에 대한 사도좌의 관할권을 지키기 위해 전례에서 슬라브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제한적인 개정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계속해서 적대적인 시선으로 성 메토디우스의 활동을 지켜보던 독일 교회는 전례에서의 슬라브어 사용과 그의 정통성을 문제 삼아 성 메토디우스를 이단자로 고발하였다.

       그는 880년에 로마로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교황에게 전례에서의 슬라브어 사용과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뛰어난 변론을 통해 자기 정통성을 인정받고 전례에서의 슬라브어 사용을 다시 인가하는 교황 교서 “인두스트리애 투애”(Industriae tuae)를 끌어냈다. 882년 교황의 뜻에 따라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성 메토디우스는 제자 두 명의 도움으로 동생의 뒤를 이어 마카베오서를 제외한 성경 전체와 그리스어로 된 교회법전을 슬라브어로 번역하였다. 독일 교회와 성 메토디우스 간의 투쟁은 일생을 두고 계속되었다. 쉼 없는 활동과 투쟁으로 건강이 나빠진 그는 885년 4월 6일 파스카 성목요일에 모라비아 지방의 고라즈(Gorazd)를 후계자로 선택하고 자신의 주교좌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모라비아의 대성당에 묻혔는데, 그곳이 어디인지 오늘날 알려지지 않았다.

       9세기 교회의 탁월한 인물로서 비록 힘든 생애를 살았지만, 성 키릴루스와 성 메토디우스는 토착화된 방식으로 슬라브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 ‘슬라브 민족의 사도’로 불리며, 동유럽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에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그리고 두 형제와 제자들이 행한 슬라브 전례는 오늘날의 러시아 전례가 되어 러시아, 세르비아,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그대로 전해온다. 또한 성 메토디우스의 선종 이후 박해를 받아 추방된 제자들에 의해 두 형제의 정신은 불가리아와 보헤미아 그리고 남부 폴란드로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모라비아의 수호성인인 성 키릴루스와 성 메토디우스는 가톨릭교회와 그리스 정교회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래서 두 형제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일치를 도모하는데 이바지한 선구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들의 축일은 선종 직후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그리고 크로아티아 지방 사람들에 의해 매년 3월 9일에 기념했었다. 1863년 이후 교황 복자 비오 9세(Pius IX)는 그들의 축일을 7월 5일에 기념하면서 그에 합당한 전례 기도를 드리도록 허락하였다. 7월 5일은 두 형제가 모라비아인들의 개종을 위해 모라비아 왕국에 도착한 날이다. 1880년 9월 30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는 회칙 “그란데 무누스”(Grande Munus)를 반포하면서, 성 키릴루스와 성 메토디우스의 축일을 로마 보편 전례력 안에서 7월 7일에 기념하도록 규정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도 3월 9일 목록에서 이들 형제에 대해 전하며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7월 7일에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1969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보편 전례력 개정 이후로는 오늘날과 같은 2월 14일에 두 성인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1980년 12월 31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교황 교서 “에그레기애 비르투티스”(Egregiae Virtutis)를 통해 성 키릴루스와 성 메토디우스를 누르시아(Nursia)의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7월 11일)와 함께 유럽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그리고 1985년 6월 2일 회칙 “슬라브인의 사도들”(Slavorum Apostoli)을 통해 1100년 전 두 형제가 슬라브인들의 복음화를 위해 어떻게 헌신했는지 그리고 복음과 문화, 슬라브 민족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미래에 대해 언급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2월 14일 목록에서 성 키릴루스 수도자와 성 메토디우스 주교가 모라비아로 파견되어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슬라브어로 번역하기 위해 키릴 문자를 만드는 등의 노력을 통해 판노니아(Pannonia) 지역을 복음화했다고 기록하였다.♧

참고자료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하) -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342-345쪽.
  • 최익철 저, 우표로 보는 교회를 빛낸 분들 - '치릴로와 메토디오', 서울(으뜸사랑), 2014년, 81-84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1권 - '치릴로와 메토디오',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5년, 8325-8327쪽.
  • 헤수스 알바레스 고메스 저, 강운자 편역, 수도생활 역사 II - '성 치릴로와 성 메토디오', 서울(성바오로), 2002년, 324-327쪽.
  •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성치릴로 수도자와 성메토디오 주교', 서울(성바오로), 2002년, 56-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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