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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생활 속의 성경: 거실

4809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19-12-14

[생활 속의 성경] 거실 (1)

 

 

세 번째로 둘러볼 집 안의 장소는 ‘거실’이다. 우리가 거주하는 현대적인 집들은 상황에 따라 작기도 하고 크기도 한 거실을 가지고 있다. 거실에는 종종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전시되어 집을 더 아름답게 만든다. 이들은 가족의 일원임을 느끼게 해 주는 장면이나 기억이 담겨 있기도 하고, 친구들로부터 받게 된 소중한 선물이나 먼 나라에서 온 기념품 같은 매력적인 물건일 수도 있다. 하나하나 소중하게 모여진 이것들로 인해 거실은 마치 가족의 박물관이자 보존을 위한 자리가 된다.

 

이뿐만 아니라 거실에는 카펫이나 쿠션, 의자, 소파 등과 같은 편안함을 주는 것들도 자리한다. 집을 방문한 사람들이 이곳에서 편안하게 머물며 어떤 주제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상황이나,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 구성원들이 저녁에 돌아와 밖에서는 얻지 못하는 안정감 속에 낮 동안 있었던 일 혹은 TV를 통해 전해지는 정보들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때에도 이 공간에 머문다. 따라서 거실은 과거에 있었던 기억에 대한 보존뿐만 아니라 현재 서로 다른 시간표를 살아가는 가족 구성원들의 교차점이자 방문자에게는 초대한 이의 삶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지점이 된다.

 

가족들의 공유된 기억이 서려 있는 집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인 거실은 대화의 자리이다. 대화를 나눌 때, 거실은 서로의 생각과 의견을 교환하며 매일 노동에 지친 몸을 쉬게 하고 가족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바탕이 된다. 다시 말해, 거실은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 ‘나 자신’과 ‘타자(他者)’가 만나 함께 대화하는 일로 활기(Recreation)를 얻는 장소가 된다. 왜냐하면 집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가정, 종교, 사회 안에서 일어난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며 성장해 나가고, 이 행복한 기억은 근본적으로 자신이 한 가족의 일원이라는 소속감에서 기인하며, 때때로 이 소속감이 강한 위로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장소는 보통 가족의 박물관인 거실이기에 이 자리에 함께 모인 가족의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여 그의 현재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경청의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상대방을 환대하며 경청하는 자세로 이루어지는 대화는 종종 소중한 기억을 초대한다. 이 기억의 회상은 지난날을 기린다는 차원에서 축제가 되고 예식이 된다. 그러나 기억을 나누며 축제가 되고 예식을 이루는 거실 안에는 이제 소중한 기억을 담은 소박한 장식품들과 대화보다 남들에게 더 비싸고 좋아 보이는 장식품을 전시해 놓는 것으로 대체되어가는 듯 보인다. 심지어 가족 구성원에게 이를 투사하여 적용하기까지 한다. 또한 무엇인가 특별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주제가 있어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무의미한 자기 통제로 나눔의 내용은 빈곤해져만 간다. 이런 나눔 내용의 빈곤은 우리에게 대화가 마치 사랑니의 고통처럼 여겨지도록 만든다.

 

잘 살펴보면, 우리 사회가 들으려고 하는 사회가 아니라 모두 말하려고 하는 사회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사실 듣지 못하는 상태는 ‘자기방어기제’일 수 있다. 더 나아가 평범한 이야기나 삶에 관한 중요한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야기를 마침으로써 선택이라는 수고로운 책임을 피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만약 어떤 이가 들으려 하는 사람이 아닌데도 듣게 된다면 아마도 그렇게 해야 할 수밖에 없는 강제적인 상황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대화의 기본자세인 ‘경청’은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어느 사람 하나 빠짐없이 경청의 준비가 된 사람에게 자유롭게 말하기를 희망한다. 경청은 이야기와 한 몸을 이루는데 마치 도착지를 향한 단계적인 순간과도 같다. 누군가 경청하고자 한다면 지금 언급되고 있는 이야기 뒤에 숨겨진,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포착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는 무디거나 둔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대화중에 드러난 소리에 침잠함으로 오는 것이다. [2019년 11월 3일 연중 제31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상훈 안토니오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생활 속의 성경] 거실 (2)

 

 

우리는 지난 지면에서 거실을 가족 구성원의 공유된 기억이 생생히 살아있는 장소로, 구체적으로는 그 기억이 담긴 장식물이 자리한 가정의 박물관으로 칭한 바 있다. 나아가 거실은 가족 구성원이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 대화하는 곳이자, 가정을 방문한 손님에게는 그 가정의 보이지 않는 실제 삶 안으로 들어가 대화를 이루는 장소이기에 환대와 경청의 장소가 된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이번 지면에서는 이러한 거실의 면모가 성경에서는 어떻게 드러나는지에 대해 살펴보겠다.

 

사실, 성경에서는 소파와 탁자 그리고 장식품들로 채워진 우리 시대 거실의 모습을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나 ‘자신의 집’을 찾은 이들을 ‘환대’하고 대화를 나누는 부분이 두드러지게 등장한다. 이 ‘환대’를 표현할 때는 방문자를 정성으로 대접하는 외적 상황에 대한 묘사뿐만 아니라 내적 사정을 살피는 모습도 볼 수 있는데, 이때 필수적으로 동반하는 요인이 바로 ‘경청’이다. 몇 가지 구체적인 예로, 창세기의 아브라함은 햇볕이 ‘가장 뜨거운 시각’, 자신의 ‘천막’을 방문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환대를 베푼다. 늙은 나이의 아브라함은 움직이기도 힘든 더운 날씨임에도 그들을 맞이하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방문한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과정에서 그가 살아온 오랜 삶 동안 가장 창피하고도 심각한 문제, 마치 거실 한구석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차지해온 슬픈 장식품과 같은 ‘아들’의 문제까지 다루게 된다(창세 18,1-15 참조).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을 탄생시킨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경청으로 특정한다. 그리고 이 하느님 말씀의 경청은 생명의 원천으로 여겨지는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이어진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신명 4,1). ‘경청’이 하느님 백성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풍부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사무엘기 이야기들 가운데 한나의 아들 사무엘의 예언자 성소는 ‘경청’이라는 주제를 중요하고 풍부하게 묘사한다(1사무 3,1-10 참조). 구약성경 예언서 대부분의 책에서는 예언자들이 하느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그것이 드러나고, 그렇게 계시된 말씀은 듣지 않는 백성들이 하느님의 정신과 마음을 받아들이도록, 곧 ‘경청’하도록 간곡히 초대한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중요한 가르침인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제시하면서 ‘경청’에 대한 구원 가치를 강조한다(루카 8,4-21 참조).

 

이렇게 성경의 수많은 ‘환대’와 ‘경청’ 이야기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한 묘사는 아무래도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방문한 예수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마르타라는 인물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이는 데서 시작한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환대’하고자 한다. 이런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루카 10,38-39 참조). 마리아는 모든 일을 멈춘 채 ‘제자’의 태도로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었다. 마리아가 보인 행동은 단순하다. 오직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마르타가 보인 시중들고 기쁨을 주려는 것 대신 마리아가 우선적으로 선택한 행동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 가까이 가는 것이었다. 그분의 뜻을 올바르게 헤아리고, 올바르게 헤아린 뜻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것이 그녀의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경청’만 한 것은 아니다. ‘팔레스타인이라는 길 위를 걷는 이’이자 ‘아버지 하느님께 향하는 길을 걷는 이’인 예수님의 말씀을 그분의 발치에서 들었던 마리아는 그녀의 눈물과 머리카락으로 그발을 닦아 드리고 입 맞추었으며 향유를 부어드렸다(요한 12,3 참조). 그녀는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라는 말씀에 충실한 제자였다. 마리아가 예수님 발치에서 보인 절대적인 침묵은, ‘경청’없이 일방적인 행적으로 주인공이 되기 위해 자신을 완벽하다 여기며 어떻게든 남보다 높은 곳에 도달코자 애쓰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말하는 이가 어떤 사람인지를 떠나, ‘경청하는 이’만이 보일 수 있는 ‘배려’와 이웃을 받아들이는 ‘환대’는 자신에게서 이기적인 모습을 점차 지우는 만큼이나 그리스도인 삶의 단계를 오르게 한다. [2019년 12월 15일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상훈 안토니오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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